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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Sep 11. 2018

50일의 썸머

여름아 가지마


아아아

윙, 윙

매~~~~~~~~~~~앰 맴

달그락, 이슬이 맺힌 유리컵 안 얼음탑이 녹으며 그들의 질서가 재정비되는 소리가 난다.
달달해보이는 카라멜색 액체와 투명한 얼음이 덕수궁 돌담처럼 단단하게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빈티지한 무늬의 유리컵 밑을 패브릭 코스터가 받치고있고, 그 옆으로 납작하니 바닥을 받치고 있는 손이 보인다.
손을 따라 올라가보면 가벼운 나시끈 하나 걸쳐진 어깨, 선풍기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 그리고 얼음을 한가득 물고 있는 볼.
응차 하고 몸을 뒤집어 옆으로 누우면  짧은 바지 밑으로 허벅지에 대나무 돗자리 모양대로 새겨진 줄무늬.

자, 바다로 가볼까.

촤,,,, 차,,,,촤,,,차

어이!
멀리 나가있는 서퍼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
해변의 피서객들의 웃음소리, 유행가 소리, 확성기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
와글와글한 여러 사운드가 선명하게 잘 들리다가 순간 물 밑으로 둔탁하게 넘어온다.

꼬르륵, 챡 , 꾸르륵, 부글부글. 물속에 얼굴을 넣고 바다를 침대삼아 온몸에 힘을 뺀다.
물안경을 쓰고, 스노쿨링 장비가 있다면 더 좋겠다, 팔다리는 헤벌레 벌리고 바다 밑의 모래며 조약돌, 사이사이로 물고기들도 간간히 지나가는 걸 구경한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파도가 밀치는대로 둥둥.
그러다가 팔을 끌어다 몸에 붙이고 다리를 탁 차서 물 속으로 조금 들어가본다. 꿀렁 웨이브를 한번 넣어주면 몸이 더 깊숙히 내려간다. 조개를 하나 집어가지고는 발로 모래바닥을 밟아 일어선다. 겨우 물은 허벅지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
해변을 향해 조개를 들고 뛰어가며 소리친다.

여기 조개 있어! 이거 먹을 수 있어?


이번엔 산으로 가보자.

돌배기 어린아기 몸통만한 큰 나뭇잎이 빽빽하게 가득한, 백번이 넘는 여름을 겪었지만 어김없이 왕성하게 성장해버린 아름드리 나무들. 하루하루 늘어나는 몸집을 견디지 못하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철조망 밖으로 넘쳐 흘러버리는 가지들, 나뭇잎.
뜨거운 해에 달궈진 까만 머리통을 식혀주는 그늘이면서, 탬버린처럼 몸을 흔들어서 눈에 안보이던 바람에게 모양과 소리를 만들어주는 여름 나무.
그 밑에 있으면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지, 자연이 얼마나 괴물같이 무서운지 새삼 겸손해진다.


마트에도 가보자.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산해진미가 가득 들어찬 창문없는 천국.
여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복숭아. 천도복숭아로 시작해서 딱딱이 복숭아, 물복숭아까지 여름 내내 먹어도 맛있는 비싼 복숭아.
파티에 수박이 빠질 수 없어서, 빨간 뱃살에 콕콕 까만 씨를 나는 그냥 대충 알약 삼키듯 같이 넘겨버린다.
멜론 없던 시절에는 참외가 최고였는데, 노랗고 너무 예뻐.
여름 지나고나면 딱 한철 먹을 수 있는 몸값 비싼 대저토마토가 나오고, 감자 가지 양파 오이 같은 것들은 거의 개당 몇백원이라 카레 만들어 먹으면 맛있다.

벌레니 모기니 땀냄새 같은 끈적한 것들은 적당히 생략하고, 내가 여름을 사랑하는 이유는 흘러넘치는 풍요와 낭만 때문인데 확실한 건, 어린 뇌에 새겨진 세뇌가 큰 작용을 한다.
무슨 말이냐면, 나 어릴 때 매년 여름이면 “와! 여름이다!!!” 하면서 신명난 댄스가수들이 나와서 춤을 췄고, 초딩들은 그걸 장기자랑이니 뭐니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그리고 여름에는 방학이 있었고. 방학보다도 나는 방학식이 좋았다.
성적표에 선생님이 나에 대한 코멘트를 써준다는 게 좋았다. 성적은 그저 그랬고, 수재였던 언니 때문에 딱히 성적 칭찬을 받아본 적은 없다.
이번 여름에 책 몇권 읽어야지, 매일 일기 써야지! 하면서 계획표를 만들면서 내 삶에 대한 주체성을 발휘하고자 노력하는 시간들도 좋았다. 돌아보면 어린이에게 자기 삶을 스스로 꾸릴 자유는 많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러다 훌쩍 스무살이 되고, 돈을 모아 처음으로 떠난 해외여행지는 태국이었다. 3개에 만원 하는 나시티와 천삼백케이에서 산 젤리카메라를 사들고 떠난 첫 여름방학 여행. 그때 나는 비로소 여름인간으로 완성되었다.
하루 몇시간만에 어깨를 시커멓게 태우고 매일 파인애플을 먹으면서 여름 나라를 찬양했고, 카오산로드에서 몇가닥의 머리카락을 색실과 섞어 땋으며 더위에 대한 강력한 내성을 만들었다.
나의 첫 해외여행이 겨울나라였다면 나는 겨울인간이 되었을까?

1년 365일 중에 봄 가을은 합쳐 한달 조금 넘는 것 같은데, 여름도 생각해보면 7월 초순부터 8월 하순까지 겨우 50일 남짓이다.
나는 여름이 끝날 때마다 하염없이 아쉬워하는데, 연말보다 강력하게 체감하는 ‘한 시기가 또 지나갔다’는 감상 때문이다.
나에게 여름은 왕성함. 젊은이들이 옷을 입은듯 안 입은듯 건강한 육신을 드러내고, 빨갛고 노랗고 색색의 알록달록한 과일이 뚝뚝 떨어지며 이 모든 것들은 노력과 상관없이 타고나버린 성적인 메타포, 혈기가 흘러넘치는 ‘젊음’.
9월이 되어 아! 이제 가을인가 싶어지면 나에게 여름같은 젊음이 얼마 남았나. 다섯번에서 네번으로, 세번으로 점점 줄어드는 것을 손가락으로 셀 때마다 왜 이번 여름에는 바다에 양껏 들어가지 못했는지 슬퍼지는 것이다.
이번 여름에는 가까운 어디도 놀러가지 못했다. 그 대신 여름에 대한 영화를 하나 찍었다.
그냥 9월이 되니 매년 요맘때 레파토리로, 여름과의 이별로 너무나 가슴아픈 ‘나’ 에 대한 이야기.

여름인간의 이별이야기, 50일의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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