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막내작가로 시작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한동안 마음을 먼저 추스르는데 집중했다.
울고 싶으면 울고, 할머니 보고 싶으면 그리워하면서.
그래도 언제까지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호텔 뷔페로 돌아가기엔 내 손목상태가 안 좋았기에 아쉽지만 다른 일을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한국에 들어온 이유와 목표는 분명하지 않았는가!
작가가 되고 싶은 꿈 하나 가지고 그 먼 뉴질랜드에서 한국까지 날아왔는데,
뭐 하나라도 이뤄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었다.
"내가 작가로 성공하기 전까진, 절대 뉴질랜드 돌아가지 않을 거야."라고.
그래서 열심히 이력서를 쓰고,
작가구인구직을 쭉 훑어보며 되는대로 마구잡이로 이력서를 넣었다.
몇 군데에서 연락은 왔지만, 나이가 좀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그래도 할 수 있다며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 처음엔 뭐 다 그런 거지.
나이 많다고 쫄지 말자! 기죽지 말자! 생각하면서 힘낼 수 있었다.
그렇게 계속 이력서를 넣고 있는 중에 연락이 왔다.
만나서 얘기하자는 연락이었다.
기분이 좋아서 방방 뛰다가, 어떻게 얘길 해야 할까 고민을 좀 많이 했던 것 같다.
막상 면접당일이 되자, 머릿속은 그냥 하얘졌고 무슨 말을 했는진 기억나진 않지만,
막내작가로 드디어 취직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출근을 했는데!?
아무도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그냥 눈치껏 하라는 식이 아닌가?
순간, 너무 황당하였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할까?
옆에 있는 나보다 어린, 하지만 나보다 오래 일한 선배작가에게 물었다.
"전 무슨 일을 하면 되나요?"
그때, 돌아온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 프로그램 무슨 프로그램인지 찾아보지도 않고 오셨어요?
그냥 전화받아서 어떤 내용인지 작성하셔서 메인 작가님한테 보여드리면 돼요."
그래서, 일단은 그 선배작가가 어떻게 전화를 받는지, 어떤 걸 작성을 하는지
옆에서 곁눈질을 하며 눈치껏 내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버벅거리고 있었다.
그때 메인작가님이 들어오셨고, 나에게 "새로 온 막내네? 잘해보자!" 하셨다.
나는 수줍게 그렇지만, 밝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나의 주요 업무는 전화를 받고, 어떤 내용인지 작성을 하고,
프로그램 촬영이 시작되면 프리뷰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방송이 나가기 전 자막을 넣고,
녹화가 있는 날에는 촬영장에도 따라 나가서 이것저것 시키는 일 하고,
막내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출연진들을 챙기면서.
나보다 일을 먼저 시작했다고, 텃세 부리는 나이 어린 선배작가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절대 저런 선배작가가 되지 말아야지.
뭐, 좀 친절하게 알려주면 어디 덧나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 다고.
자기는 처음부터 잘했나?'
하지만, 그게 현실임을 자각하면서 나도 점점 익숙해져 갔다.
전화를 받고 어떤 내용인지 작성하는 데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하루에 수십 통을 받아야 하는 일이고,
그중에서도 메인작가님이 선택을 하셔야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취지에 맞는 통화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면 녹화한 비디오를 보면서 프리뷰를 해야 하는데,
이것도 밤을 새 가면서 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시간도 제일 오래 걸리고, 에너지드링크와 커피를 마셔가면서 졸음을 버티면서 열심히 임했다.
극한작업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거의 사무실에서 몇 날 며칠을 살기도 했다.
*프리뷰란, 20초~25초마다 붙여가면서 녹화한 내용 그대로 워드나 한글에 옮겨 적는 작업이었다.
PD님이 편집하실 때 보시기 편하라고 하는 작업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힘든 작업이 끝나면, 보도자료도 써야 하고,
방송 전에 나온 녹화본을 보면서 자막도 써야 한다.
자막검수를 마치고 나면 TV에 방송이 나오게 되는데, 가끔 오타가 발견될 때면 혼나기도 했다.
방송을 모니터 하고 난 후에 엔딩 크레디트에 딱 한 줄, 내 이름이 뜨면 그게 그렇게 좋고 설렜다.
그래서 기다렸다가 사진도 찍어 친구들이나 부모님께 보내드리곤 했다.
그거 하나가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단 말인가? 싶지만, 정말 짜릿하다.
그동안 내가 한 고생들이 그거 하나로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쉴 틈 없이 다음 촬영준비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쳇바퀴 돌아가듯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점점 내 건강에 이상신호가 감지되었다.
한 번은 지하철을 타고 퇴근을 하는데,
식은땀이 나고 앞이 깨지듯이 보이고 어지러워서 뭔가를 잡으려는 찰나에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다. 급성저혈압이었다.
링거를 맞고 나왔는데, 40만 원이 나왔다. 그때 당시엔 나에게 큰돈이었던 40만 원.
그때, 또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