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0, 3 p.m. / 노희찬, 현석준
* 본 후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최후진술하라."
지동설을 지지하는 <코페르니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 줄여서 <대화>를 저술하여 죄인으로 몰려 종교재판에 회부된 늙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에게 울려 퍼지는, "최후진술"을 촉구하는 재판관의 목소리로 극은 시작한다.
지동설을 부정하고 천동설을 지지하는, <대화>의 속편을 저술하여 최후진술을 끝맺겠다고 서약한 갈릴레이. 쇠약한 몸을 이끌고 피렌체에 있는 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향한 긴 여행을 시작한다.
그런데 여행을 이끄는 길잡이가 갑자기 갈릴레이를 격하게 반기며 '넘버 원 팬'을 자처한다. 그러더니 하는 말. "같은 64년생이니 말 놔도 되지?"
그는 바로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였다.
64년생. "1564년"생. 과학과 문학에 크게 한 획을 그은 동갑내기 월드스타,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윌리엄 셰익스피어'. (15)64년생 또래라는 사실만 빼면 전혀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이 서로 만난다면? 이 기발한 상상력이 만든 뮤지컬이 <최후진술>이다.
'진실'을 고했다가 살기 위해 '거짓'을 완성하려는 갈릴레이의 마지막 여정에, 평생 미친듯이 '허구'의 작품을 써냈던 대문호 윌리엄이 안내자가 되어 갈릴레이를 인도한다. 겉보기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항구로. 그러나 사실은, '진실'로.
어떻게든 살고 싶었던 갈릴레이는 죽음의 여행길 위에서도 죽기 살기로 <대화>의 속편을 완성하려 한다. 그 길에서 갈릴레이는 자신이 '진실'을 공표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주었던 이들을 다시금 마주한다. 코페르니쿠스, 프톨레마이오스, 존 밀턴, 브루노. '진실'을 써내려갈 적 붙들었던 그들에게 갈릴레이는 이제 자기가 '거짓'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매달린다. 그러나 모두 입을 모아 한 가르침을 건넨다. 결국에는 네가 아는 그 '진실'이 중요하다고. 길을 걷는 내내 갈릴레이에게 다가온 가르침은, 마지막에 윌리엄의 입을 통해 결정타를 날린다. "진실이 중요해!"
나이만 같을 뿐 사는 곳도, 전문 분야도 전혀 닮지 않은 갈릴레이와 윌리엄. 갈릴레이의 생애에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던 인물들. 이 모든 퍼즐 조각이 모여 '진실'이라는 한 뚜렷한 그림을 완성한다. 도저히 어우러질 수 없을 것 같던 이들이 하나의 주제를 이루어내는 탄탄한 서사가 매우 돋보였다. 어떤 그림이 될지 뻔히 다 보이는 '선 따라 그리기'가 아닌, 무얼지 짐작도 안 가다가 순서를 따라 잇는 순간 온전한 그림이 탄생하는 '점 이어 그리기' 같았다. 갈릴레이, 윌리엄 셰익스피어, 코페르니쿠스, 프톨레마이오스, 밀턴, 브루노. 그들은 하늘에 점처럼 박힌 별이었고, 그들이 이어질 때 우주의 질서와 움직임을 증언하는 별자리가 탄생했다. '진실'이라는 이름의 별자리.
별자리를 만들기 위해 별을 잇는 선 역할은,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음악이 감당했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별 같은 음계 타악기 선율에서부터 강렬히 치고 들어오는 일렉트릭 스트링까지, 매우 다양한 멜로디와 악기 구성이 극을 채웠다.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다. 인물의 감정선과 분위기 흐름까지 그려내는, 유려하게 움직이는 붓이었다.
특히 마지막 넘버, '그래도 지구는 돈다'가 백미다. 결국 생의 끝, 여정의 마침표에 다다른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서 그랬듯이 죄를 고백하기 시작한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는 거짓됨이었으니..." 마치 원점으로 돌아가버린 듯, 지켜보던 관객이 실망하려던 찰나에 그의 고백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마침내 갈릴레이는 외친다. "그럼에도 지구는 돈다!" 그는 '진실'을 선택했다. 진실을 외치고 갈릴레이와 윌리엄이 함께 별을 노래하는 대목은 극 중 등장했던 넘버의 리프라이즈인데, 극 내내 '거짓'을 완성하려 애쓰던 갈릴레이가 불렀던 넘버가 이젠 '진실'을 마주하며 다시 등장할 때 그 쾌감이 엄청나다. 진실로 마침표를 찍고, 우주 질서를 증거하는 별이 되는 갈릴레이와 윌리엄이 토해내는 진짜 최후진술, "그래도 지구는 돈다."
노희찬 배우는 오늘 공연에서 처음 보았다. 순박한 시골 강아지 상이라 처음에는 마냥 귀여웠는데, 단단하고 힘있는 성량과 캐릭터 흐름에 따라 적절히 대사 톤을 바꾸는 능력에 놀랐다. 유약하고 두려워하는 갈릴레이의 본심을 참 잘 그려내셨다.
현석준 배우도 처음 보았다. 데뷔한 지 이제 막 2년이 지난 신예인데, 상당히 균형 잡힌 실력이 돋보여 참 마음에 들었다. 또 굉장히 '각 잡고' 준비했다는 느낌도 받았다. 어떻게든 최고의 공연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약간 '욕심쟁이' 스타일인 듯. :) 무엇이든 다 잘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너무 완벽하려다 보면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심해질 수 있으니, 꾸준히 경험하고 배워가면서 완급 조절을 잘 하도록 성장하길 바라 본다.
내 인생의 '최후진술'은 무엇이 될까.
삶의 끝자락에서 내가 남기고 갈 '진실'은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