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안녕, 나의 검은 행운

뮤지컬 <개와 고양이의 시간> 모티브

by 서빈들

* 해당 글은 뮤지컬 <개와 고양이의 시간>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하였습니다.

*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된 넘버를 모티브로 하여 작성하였기에, 글에 스포일러가 굉장히 많습니다.

스포일러가 있다는 점 반드시 유념하시고 읽어주세요!








<안녕, 나의 검은 행운>

by JaneyJ


* Motive: 뮤지컬 <개와 고양이의 시간> 中 M16. "개들의 랩소디 R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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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큰 소리였어. 드넓은 찻길에서 성을 내며 빵빵 달리던 자동차 소리보다, 내가 화들짝 놀라 꼬리를 잔뜩 부풀리고 달아났던 시끄러운 공사장 소리보다도 더 크고, 무서운 소리였어.

털을 잔뜩 세우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어. 날 때리려던 그 못된 놈은 다리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어. 그 옆을 보니 똑같이 생긴 옷을 차려입은 여러 인간들이 서 있었어. 이상한 쇳덩이를 손에 들고. 혹시 저기서 소리가 난 걸까?


'그런데, 랩터는 어디 있는 거지?'


분명 너도 거기 있었어. 내 비명을 듣고서 나쁜 놈에게 달려들던 네 눈빛이 똑똑히 기억 나. 무서운 살기. 너는 눈을 번뜩이며 단숨에 그놈 다리를 물고 늘어졌지. 그래, 네가 그렇게 그 인간을 쓰러뜨린 사이에 나는 재빨리 벗어났어.

넌 분명히 여기 있을 텐데. 어디 있는 거지.


같은 옷을 입고 쇳덩이를 찬 인간들이 드디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 중 두어 인간이 다리 다친 그놈을 일으켜서 거의 끌다시피 데리고 나갔어. 빽빽이 서 있던 인간들이 흩어지자 드디어 앞이 좀 보이기 시작했어. 살며시 몸을 일으켜 걸어가는데, 내 눈에 보인 건......


"...... 랩터?"


윤기 흐르는 검정 털. 뾰족한 귀. 날렵하고 가느다란 다리. 맞아, 랩터 너 맞아. 그런데, 아냐, 뭔가 좀 달라.


"..... 랩터, 랩터......! 정신 차려 봐!"


언제나 호기심과 다정함으로 반짝이던 눈. 프리스비 놀이를 설명하거나 아이비 얘기를 꺼낼 때면 쉴 새 없이 빛나던 눈. 랩터 너는 항상 그런 눈빛으로 날 바라봤는데. 그런데 지금 내가 보는 랩터는, 그런 빛을 찾아볼 수도 없는, 공허하고 힘없는 눈을 하고 있어.


"랩터, 내 말 들려? 응? 나 좀 봐, 정신 좀 차려 봐!"


내가 부르면 이리저리 휙휙 춤을 추던, 장난기 넘치던 네 꼬리. 빙글빙글 돌던 네 꼬리가 너무 신기해서 괜히 매번 건드려 보았지. 넌 그게 신이 난다는 듯 더 열심히 꼬리를 흔들어댔고, 나는 기를 쓰고 뛰어오르며 네 꼬리를 잡으려 애썼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아무리 불러도 네 꼬리는 대답이 없어. 축 늘어진 채 조금도 움직이질 않아.


"랩터, 랩터......"


네 목에 앞발을 대고 있는 힘껏 꾹꾹 눌러 보았어. 평소 같으면 "간지러워!"라며 뒹굴었을 네가 꼼짝도 안 해. 덜컥 겁이 나서 냅다 네 귀를 깨물었어. 그런데 넌 아프다는 소리도 안 해.

어떡하지? 무슨 일이지? 무서워서 난 그저 네 곁을 빙글빙글 돌 뿐이야. 그런데 순간 내 발 밑에서 찰박, 하는 소리가 났어. 놀라 내려다보니, 내 발치 털이 붉게 물들어 있었어. 뭐지? 고개를 휙 돌렸는데, 네 배와 옆구리 부분도 온통 붉은색이었어. 그 붉은 물이 네게서 흘러 나와 바닥을 적신 거였어.


순간 두려운 기억이 떠올랐어. 내가 말했었지, 어떤 인간이 나한테 돌을 던지는 바람에 내가 맞아서 쓰러졌다고? 그때 돌을 맞았던 곳에서도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나왔어. 너무 아팠어. 난 아직 어렸는데도 그 순간, 이런 게 죽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럼 랩터, 너도 지금 죽을 수도 있다는 거야?


내가 그렇게 다쳤을 때, 어떻게 했더라? 맞아, 우리 엄마가 다친 곳에서 나오는 붉은 물을 싹싹 핥아줬어. 더는 그 물이 안 나올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래, 그럼 나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겠지.

붉게 물든 네 배와 옆구리를 핥기 시작했어. 비릿하고 이상한 맛. 담장을 파헤칠 적에 올라오던 그 비릿한 느낌과 꼭 닮았어. 비릿하면서 위험한 느낌.

순간 깨달았어. 랩터, 넌 많이 다쳤어. 네가 위험해.

그래서 난 더 열심히 핥았어. 내 혀가 얼얼해질 만큼 죽기살기로. 그런데 이상해, 아무리 핥아도 붉은 물은 그칠 줄을 몰라. 불길한 이 느낌, 이상해, 무서워. 랩터, 도와줘, 대답 좀 해 봐......


"...... 너,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익숙한 목소리. 비록 지금은 아주 희미하게 잦아드는 소리지만, 난 분명히 알아들었어. 내가 프리스비 대신으로 갖고 놀던 뚜껑을 물고 달아나면 돌려달라며 컹컹 짖을 때나, 너무 뛰어서 다리가 아프다며 낑낑댈 때나, 네 목소리는 한결같으니까. 어디서든 난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랩터, 랩터! 괜찮아? 괜찮은 거지? 응? 그치?"


내가 핥아준 게 효과가 있었나 봐, 그렇지? 이제 괜찮은 거지? 네가 어서 일어나기를 기다렸어. 그런데 넌 여전히 힘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가만히 엎드려 있을 뿐이야.


"...... 나는 사람을 물었어."

"그... 그게 왜?"

"사람을 문 개가...... 더 이상 살 수는 없는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네 눈이 그토록 슬퍼 보였던 적이 없어. 네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물은 멈추질 않아. 이게 그 뜻인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랩터가 그놈을 물어서? 나를 구해 주려다가? 내가 랩터한테 같이 들어가서 확인해보자고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바들바들 떨면서 걸어가 네 얼굴 앞에 멈춰섰어. 반짝이던 눈 대신, 힘이 하나도 없는 네 두 눈이 나를 마주보았어. 널 이렇게 만든 건, 그런 건......


"미안해, 랩터, 미안해. 내가, 내가...... 괜히 들어가자고 해서......"


계속 눈물이 났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널 더 이상 핥아줄 수도 없었어. 그럴 수가 없었어. 다 나 때문이었으니까. 나만 아니었다면, 내가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더라면......

미안해, 미안해, 랩터. 내가 미안해.


"...... 아니야."


얼굴을 스치는 따스한 감촉. 엄마가 어릴 적 날 싹싹 핥아줄 때 그 느낌이야. 고개를 들어보니, 애써 혀를 내밀어 내 얼굴을 슥 핥아주는 네가 보였어.


"들어오길 정말 잘했어. 네 덕분에 찾았잖아. 루이도, 아이비도...... 그래,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플루토."


플루토.

참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로는 처음 들어보는 내 이름.


"너, 지금...... 나 뭐라고 불렀어?"


내가 아무리 내 이름은 플루토라고 몇 번이나 악을 쓰며 말해도, 넌 항상 날 '루이'라고 불렀잖아. 검은색 털에, 금색으로 빛나던 눈, 겁없는 성격에 말투까지 똑 닮았다면서, 내가 분명 루이의 환생이 틀림없다고 질리도록 떠들었지. 난 루이도 아니고, 환생 같은 거 다 헛소리라고 매번 말해 줘도 넌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 그래서 네가 날 루이라고 부를 때마다 은근히 짜증이 났는데......

지금은 네가 날 내 이름으로 불러 주었는데도, 기쁘지가 않아. 아니, 오히려 어색해.

이름이 생기면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네가 그랬지? 네가 날 루이라고 부르던 그때와, 네가 날 플루토라고 불러준 지금, 그럼 난 이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걸까?

그런데 그 '전혀 다른 삶'이, 네가 떠난 삶, 네가 없는 삶이라면?


'싫어, 싫어, 그런 삶이라면 차라리 난 루이로 살래.'


몸이 바들바들 떨리며 눈물이 다시 흘렀어. 너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날 부드럽게 핥아 주었지.

"있잖아, 네가 루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 없어. 너는, 그날 그 따뜻하고 상냥했던 밤이 내게 보내준 선물이야. 그건 변하지 않아. 그래, 넌 나의 검은 행운이야, 플루토."


네 목소리는 힘없지만 여전히 따뜻했어.


두어 번 더 나를 핥아주던 네가 다시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렸어. 이제 고개 들 힘조차 없어 보이는 네게 난 조심스레 다가가 네 뺨을 핥아 주었어. 너, 네가 어릴 적에 너희 엄마가 이렇게 해 주셨다며.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면서 웃던 네 얼굴이 생각나. 그 얼굴, 다시 보고 싶어. 거칠고 인정 없는 도시, 어둠이 깔린 그곳 골목을 겁도 없이 함께 달릴 적에 보았던, 행복한 네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내 마음이 다행히도 통했는지, 네가 날 보며 살짝 웃었어.


"플루토, 너한테 참치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내가 전에 했던 얘기 기억나? 오래 전 시작된 개와 인간의 역사. 이제 그게 너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거야."


기억하지. 늑대와 인간이 싸우던 시절, 추운 겨울 길을 잃은 늑대와 무리에서 낙오되어 헤매던 인간이 함께 살게 되었다고 네가 말했잖아. 그 특별한 늑대의 후손이 자기라며 으쓱이던 네 모습이 눈에 선한데.

사실은 그때, 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네가 괜히 뻐긴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지금,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고 있다니. 내가 참치에게 특별한 고양이가 된다는 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지?


"그걸...... 그걸 어떻게 알아보는 건데?"


네가 씩 웃음을 지었어. 날 놀릴 때면 으레 짓던 그 장난스런 미소. 비록 힘은 없지만, 내가 보고 싶었던, 그 미소야.


"바보...... 너도 이미 알잖아?"

"...... 내가?"

"얘기 해 줬었지, 내가? 아이비랑 처음 만난 날. 철창 사이로 비치는 그 눈을 바라봤을 때, 햇살처럼 따사로운 그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난 바로 알았어. 우리는 이어져 있다는 걸.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서로에게 돌아올, 그런 사이가 될 것이라는 걸. 플루토, 너도 참치 눈을 기억해 봐. 참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려 봐. 눈을 보면, 목소리를 들으면, 넌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네 운명이 누구인지."


눈을 보면, 목소리를 들으면......


'플루토-'


내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준 그 목소리.


'위로해 준 거야? 고마워, 고마워, 플루토.'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을 슥 핥아 주었을 때, 나를 바라보던 깊고도 다정한 그 눈빛.


'집에 오면 네가 있고, 그래서 그게 너무 좋아. 고마워, 플루토.'


어떤 기억을 떠올리든 거기 참치가 있어. 참치 목소리, 참치 눈빛, 참치 냄새, 참치 손길.

이런 거구나, 운명이라는 게. 랩터가 해 준 얘기, 나도 이제야 알 것 같아. 눈을 보면 알게 되는, 목소리로 알게 되는, 내 마음에 깊이 자리잡은 그 운명 같은 존재.


"...... 플루토, 나도 이제 아이비에게 돌아가는 것 뿐이야. 나랑 아이비는, 서로 이어져 있는 존재니까. 난, 아이비에게 돌아가야 해. 지금이 그 때야. 지금도 들리거든. 나를 부르는, 그 운명 같은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네 눈이 조금씩 감기는 게 보여. 목소리도 잦아들어.

자꾸 눈물이 나려 해. 이렇게 헤어지기는 싫단 말이야.


"... 프리스비...... 저거, 왜 이렇게 멀리 있냐."


네 앞발이 조금씩 움찔거리는 게 보였어. 저만치 떨어진 노란 프리스비가 눈에 들어왔어. 낡고 때묻은, 네 오래된 프리스비.

나는 서둘러 프리스비를 물어다 네 발에 살며시 올려 놓았어. 힘겹게 코를 움직여 프리스비 위에 올려놓는 너를 보고, 나도 조심스레 코를 갖다 대어 보았어.

네 말이 딱 맞았네. 햇볕에 마른 수건 냄새도 나고, 막 꺼낸 향긋한 빵냄새도 나고, 공원에서 물씬 풍기던 풀냄새도 나고. 무엇보다도, 네 냄새가 잔뜩 나. 너, 이걸로 아이비랑 정말 재미있게 놀았겠구나?


"...... 랩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랩터, 랩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보는데, 목소리가 잔뜩 떨리며 잘 나오지를 않아.


"래, 랩터..... 흐흑, 흑, 흐흑."


목소리 대신 눈물이 나와. 멈출 수가 없어. 쉴 틈 없이 흐르는 눈물 사이로 네 얼굴이 비쳐. 눈을 감은 채 프리스비에 얼굴을 살며시 올려놓은 네 표정은, 행복해 보였어. 아이비 생각을 한 거야?

네 발치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웅크려 울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었어. 누군가 울먹이며 내 등을 쓰다듬어. 참치겠지? 참치 손길이 닿는 순간, 더 슬퍼져서 꼼짝도 않고 거기 웅크린 채 계속 울었어.


랩터, 네가 나보고 너의 검은 행운이랬지?

사실 네가 내 행운이었어. 그날 널 만나지 않았다면, 너와 함께 밤새 그 골목을 달리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나는 참치가 내 운명인 줄 알아보지도 못했을 테니까. 눈을 보면, 목소리를 들으면 알게 된다는, 그 멋진 얘기를 네게서 듣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고마워, 랩터. 고마워. 내게 와 줘서.


"안녕, 나의 검은 행운."




- The End -







뮤지컬 <개와 고양이의 시간>

2020.7.7 ~ 2020.9.20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


송원근, 고상호, 유리아, 배나라

고훈정, 문태유, 강지혜, 김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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