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밀밭의 기억

뮤지컬 <아킬레스> 모티브

by 서빈들

* 해당 글은 뮤지컬 <아킬레스>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되었습니다.
* 글에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밀밭의 기억>

by JaneyJ

* Motive: 뮤지컬 <아킬레스> 中 첫 장면 및 M2. "퍼펙트 홈", M4. "허수아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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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낳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그날도 난 엄마와 밀밭에 나가 있었다. 엄마는 밀밭을 유난히 좋아했다. 잘 익은 밀 이삭이 바람에 물결치는 모습이 마치 황금빛 바다 같다면서. 집을 온통 밝은 레몬색으로 칠한 것도, 찬란히 빛나는 황금 밀 물결을 따라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들었다. 불행하게도, 레몬색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은 밀을 죄다 베어 버리고 남은 시들한 겨울 밭에 가까웠다.

아빠는 틈만 나면 정원에서 총을 쏘았다. 손이 하도 떨려서 과녁에 제대로 맞추는 일이 드물었는데도 아빠는 개의치 않았다. 일층에는 온갖 총이 나란히 장식되어 있는, 아빠의 작은 박물관이자 왕국이 있었다. 번쩍이는 총들이 멋있어 보여서 나도 종종 그 왕국에 슬며시 들어가 총을 하나하나 쓰다듬어 보며 구경했다. 물론 엄마 눈에 띄는 순간 난 곧장 왕국에서 추방당했다.

엄마는 추방당해 시무룩해진 나를 또 다른 왕국으로 데리고 갔다. 낡은 피아노가 놓인 이층 방. 그곳이 엄마의 왕국이었다. 엄마가 연주를 시작하면, 나는 침대에 엎드려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연주였다. 그 소리에 취해 내가 까무룩 잠들 뻔한 순간, 탕! 정원에서 커다란 총성이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라 동그랗게 뜬 내 눈에 엄마의 굳은 얼굴이 비쳤다. 옅게 떨리던 엄마의 손가락이 한층 더 높고 낮은 음을 강하게 때렸다. 방금 울린 총소리보다도 더 크게. 이제 연주는 더이상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았다. 아니, 연주라기보다는 전쟁이었다. 정원에 울려퍼지는 날카로운 총성과, 피아노가 뱉어내는 비명과도 같은 격렬한 음표의 전쟁. 그 전쟁 한복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귀를 막은 채 웅크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문득 소리가 멈췄다. 살며시 귀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어보니, 공허한 눈빛을 하고 긴 한숨을 내쉬는 엄마가 보였다. 한동안 말없이 피아노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엄마는 천천히 일어나 내 곁에 와서 앉았다.

"아킬레스, 엄마랑 같이 밀밭에 갈까?"
"... 싫어. 가면 심심해."

난 밀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느다란 밀 이삭 무리와, 밭 한가운데 우뚝 선 앙상한 허수아비 말고는 딱히 볼 것도 없는 곳이니까. 그 재미없는 풍경을 몇 시간이고 한참 바라보는 엄마를 어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부루퉁한 내 표정을 보고 엄마는 빙긋 미소지었다. 엄마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켜 함께 일층 부엌으로 내려갔다. 찬장을 열고 엄마가 주섬주섬 꺼내든 것은...

"자,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 이거 갖고 있으면 안 심심하겠지?"

무지개 막대사탕.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간식. 웬만해선 잘 허락해 주지 않는 무지개 막대사탕을 엄마가 먼저 권했다는 건, 내게는 엄마의 제안을 거절할 선택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난 한 손에는 사탕을 들고 한 손으로는 엄마 손을 맞잡고 함께 밀밭에 갔다.

역시나 밀밭에선 할 게 없었다. 낡아빠진 옷을 걸친 얼굴 없는 허수아비 주변에 맴도는 새들이나 구경하는 것밖에는. 그래도 달콤한 무지개 막대사탕을 먹을 수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사탕을 빨면서 멍하니 앉아 구경을 하는데, 내 귀에 엄마의 나지막한 한탄이 들려왔다.
날 낳은 걸 후회한다는.

그 순간 세상 무엇보다도 달콤했던 무지개 사탕은 맛을 잃어버렸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발 구르는 소리에 엄마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씩씩대며 엄마를 노려보았다. 사탕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총을 쥔 채 떨리던 아빠 손처럼.

"왜 그래, 아킬레스?"

엄마 물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다. 말 대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분노가, 아픔이, 배신감이 한 방울, 한 방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엄마는, 내가 죽기를 바란다는 거잖아!'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대신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마침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무지개 막대사탕을 거칠게 땅바닥에 내던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자 항의였다. 알록달록한 사탕은 금세 흙투성이가 되었다. 엄마는, 내가 저 막대사탕처럼 되길 바란다는 걸까?

우는 나와 흙 범벅이 된 막대사탕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번갈아 쳐다보던 엄마는,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풋, 하고 얇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게 웃겨? 난 그런 엄마 모습이 더 미워서 입술을 꽉 깨물고 엄마를 눈물 젖은 눈으로 째려보았다. 엄마는 여전히 웃으면서 내가 내던진 막대사탕을 주워들었다.

"아킬레스, 이리 와."

엄마가 흙 묻은 막대사탕을 내밀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난 도끼눈을 하고 뒷걸음질쳤다. 엄마는 헛헛하게 웃었다.

"얘도 참.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냐. 엄마가 미안해. 그러니까 화 풀고."

엄마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그걸 보니 미안하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화가 금방 풀리지는 않았다. 난 슬금슬금 다가가 손을 뻗어 엄마 손에 들린 막대사탕을 낚아챘다. 그리고 홱 뒤돌아서서 사탕을 입에 밀어넣었다.

"어어, 더럽잖아. 그걸 그냥 먹으면 어떡해."

뒤에서 엄마가 말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를 등지고 서서 그 흙투성이 무지개 사탕을 열심히 빨아먹었다. 달콤함 사이로 텁텁하고 씁쓸한 맛이 섞여들었다. 나는 눈물 닦는 것도 잊은 채 씁쓸한 흙을 내 뱃속에 꾸역꾸역 채워 넣었다.

엄마는 그때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제는 물어볼 수도 없다. 밀밭을 그리도 좋아하던 엄마는, 얼마 전 그곳으로 돌아가 잠이 들었다. 엄마가 바다로 떠났다던 아빠 말이 아예 거짓은 아니었다. 황금빛 바다, 밀 이삭이 물결치는 그곳 언저리로 엄마는 돌아갔다.

엄마 손을 붙들고 밀밭을 구경하던 꼬마는 이제 허수아비 곁에 홀로 서 있다. 하도 키가 커서 아예 드러누워 올려다보곤 했던 허수아비는 이제 고개만 살짝 들어도 그 얼굴이 보였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낡은 천으로 대충 누덕누덕 기운 얼굴.
머릿속으로, 그 얼굴에 엄마 얼굴을 그려 보았다. 가족사진을 찍던 날, 한껏 멋을 낸 나를 보며 웃던 얼굴. 아빠 담배를 뺏으며 세차게 소리치던 얼굴. 눈을 질끈 감고 피아노를 두드리며 정원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전투를 벌이던 얼굴. 알록달록한 알약을 한 움큼 쥐고 멍하니 서 있던 얼굴.

그리고, 그 날의 얼굴.
날 낳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중얼거리던 얼굴.

내가 기억하는 그 때의 엄마 눈은, 내가 보았던 가장 슬픈 눈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아리고 속이 쓰려 왔다. 그날 내가 삼킨 밀밭의 흙이 내 뱃속에서 힘껏 외치는 것 같았다. 엄마의 목소리가 되어.

'네가 나처럼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문득 내 손에 들려 있던 무지개 막대사탕이 떠올랐다. 나에게 무지개는, 그 사탕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운 존재였다. 그렇다면 엄마에게 무지개란 무엇이었을까? 엄마가 떠난 날,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엄마가 매일같이 집어삼키던 무지갯빛 알약이 불현듯 생각났다.
엄마는 내게, 아픈 무지개가 아니라 행복한 무지개를 주고 싶었던 걸까.

'네가 아름다운 것만 볼 수 있게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뒤돌아선 채 흙 묻은 사탕을 서럽게 빨던 내게, 엄마가 정말로 해 주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눈물이 흘렀다. 한 방울, 두 방울, 한 줄기, 두 줄기가 되어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허수아비 곁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엄마 손길 같은 밀 이삭의 흔들림에 묻혀, 엄마 목소리 같은 밀밭 바람소리에 몸을 맡겨 그렇게 있기로 했다. 이 눈물이 멈출 때까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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