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글은 뮤지컬 <아킬레스>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되었습니다. * 글에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황금빛 바다>
by JaneyJ * Motive: 뮤지컬 <아킬레스> 中 M3. "파라다이스", M4. "허수아비왕" -
"다녀왔습니다."
조용했다. 뭐, 평소에도 숨막히는 듯한 정적에 익숙하기는 했지만. 엄마와 아버지 한바탕 말다툼을 하고 나면 흐릿한 담배 연기와 약병에 반사되는 저녁 햇살로 찾아오는 침묵은 어느새 내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익숙하지 않은 적막함. 친절하지 않은 고요함.
"... 엄마?"
'왔니, 아킬레스?'라며 살며시 미소짓는 엄마의 얼굴 대신, 나를 맞이한 건 무지갯빛 알약들이었다. 거실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알약들.
한 알을 집어들었다. 푸른빛 알약. 파라다이스에 가면 자주 오물거리며 먹었던 블루베리 캔디가 떠올랐다. 그땐 그게 무지개 막대사탕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달콤했는데. 파라다이스에서 추방된 이후로는 다시는 맛보진 못했지만. 아니, 맛보려 하지도 않았다. 이젠 그걸 먹으면 달콤함 대신, 우리 아버지 입가에 묻어 있던 핏자국 같은 날카로움과 불쾌하게 비릿한 맛만 느껴질 것 같았다. 엄만 이걸 왜 먹었을까? 엄마 입에는 이것도 블루베리 사탕처럼 달콤했을까? 나도 모르게 혀를 살짝 대 보려다 곧 그만두었다. 어쩌면, 엄마는 이 알약이 전혀 달콤하지도 않고 도리어 쓰디쓰다는 걸 알면서도, 독하게 이걸 삼켰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살고 싶어서? 아니면... 죽고 싶어서?
"아킬레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아버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 일찍 돌아왔구나." "아버지... 엄마는요? 이건 왜 여기 다 떨어져 있어요?"
푸른빛 알약을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쉴 새 없이 떨리는 손으로 알약을 받아든 아버지는 한동안 말없이 알약을 들여다보았다. 공허한 눈빛으로. 이내 아버지는 반대편 손을 덜덜 떨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킬레스, 잠깐 같이 나갈까?"
갑작스런 제안에 조금 놀랐지만, 나는 곧 순순히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힘겹게 절뚝이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따라 터벅터벅 걷다 보니, 어느새 내 눈 앞에서는 노랗게 익은 밀 무리가 한들한들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 한가운데, 허수아비가 그 앙상한 막대 몸뚱아리를 애써 뿌리박고 있었다.
"아킬레스, 엄마가 여길 좋아했던 거 알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바다가 좋다고 말했었다. 음악학교에 다닐 적, 여름이 되면 엄마의 절친한 친구 케이론과 함께 자주 근처 바다로 놀러 갔었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은 내륙 지방이라 바다를 볼 수 없었다. 그러자 엄마는 푸른 바다 대신, 황금빛 바다를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다투고 난 뒤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면,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밀밭으로 향했다. 나는 춤추는 황금빛 밀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는 엄마 곁에 슬그머니 다가섰고, 엄마는 가만히 내 손을 잡아주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엄마가 없다. 황금 바다를 바라보던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 대신, 낡은 옷을 걸친 허수아비만 보인다. 부드럽고 따스한 엄마의 하얀 손 대신, 떨리는 아버지의 구릿빛 손이 내 손을 붙들고 있다.
"아킬레스, 네가 이 말을 이해할진 모르겠지만..."
밀 이삭이 서로 부딪히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뚫고, 아버지는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엄마는... 엄마는 바다로 떠났단다. 네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곳으로." "그럼... 엄마가 아주 멀리 떠났다는 말이에요? 우리 사는 곳에는 바다가 없잖아요."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그렇지. 멀리... 멀리 떠났지. 하지만, 동시에 그리 멀지도 않을 거야."
그러고선 아버지는 밀 이삭 하나를 잡고 연신 그것을 쓰다듬었다. 뾰족하게 뻗은 밀 까끄라기가 아버지 손을 찔러댔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았다.
나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는 왜 떠난 걸까?
어쩌면...
"나 때문에 떠난 거예요?" "응?" "엄마가... 나 때문에 떠난 거예요?"
울기 싫은데 자꾸 눈물이 나왔다. 어릴 적, 날 낳은 걸 후회한다고 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울렸다. 그래서일까.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 아니다, 아킬레스."
떨리는 손길이 내 눈가를 어루만졌다. 나는 흐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손은, 밀 까끄라기에 찔리고 쓸려 군데군데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네 잘못이 아냐."
아버지의 목소리도 아버지 손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래, 적어도... 적어도 네 잘못은 아니다."
상처 난 손이 내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럼 누구 잘못인가요, 라고 물으려는 순간, 아버지가 손을 거두어 가더니 자기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두드릴 때마다 상처를 비집고 흘러나오던 피가 방울져 밀 이삭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아버지 눈가에 매달려 있던 이슬방울도 함께 떨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황금빛 바다 한가운데서, 바람을 따라 외롭게 춤을 추는 허수아비만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