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때, 다른 곳에서, 같은 마음을 그리는 이들의 이야기
* 해당 글은 뮤지컬 <아킬레스>와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되었습니다.
* 글에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 Motive: 뮤지컬 <아킬레스>의 파트로클로스, 그리고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의 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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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아요. 이 정도로 합의하죠.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어요.”
“별 걱정을 다 하는군 그래. 못 믿을 놈이면 내가 여태 이 일을 하고 있겠나? 그 친구한테 계획 제대로 전달해 주고. 조금이라도 차질 생기면 큰일 나.”
길고 길었던 회의가 끝났다. 회의라기보다는, 협상에 더 가까웠달까. 사내는 꼬깃꼬깃한 지폐 한 뭉텅이를 손에 쥐고 빠르게 한 장씩 넘겨 세어 보더니 이내 야무지게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협상 체결을 위해 지불한 대가였다. 콘서바토리 시절 몇 번 참가했던 콩쿠르에서 운 좋게 탔던 상금, 그리고, 차라리 안 받고 말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언제 요긴하게 쓰일지 모르니 받아다 모아 두었던, 유겐트 활동을 하며 조금씩 받았던 수당. 그 모든 것이 오늘 내 손을 떠났다. 앞으로 살면서 그만큼 많은 돈을 만져 볼 날은 다시 오지 않겠지.
그래도 그게 목숨값보다 더 할까.
“이런, 비가 꽤 많이 오네.”
사내가 쯧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캔디숍에 들어설 때부터 날이 좀 우중충하더라니. 협상에 열을 올리느라 빗방울이 하나 둘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지도, 빗방울이 채찍 같은 빗줄기가 되어 세차게 창을 내리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자네, 전단인지 뭔지 만들러 가야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장대비가 쏟아져서 어쩌나.”
“뭐, 어차피 바로 맞은편인데요. 얼른 가 봐야겠네요.”
“저거라도 쓰고 가. 아무리 가깝다지만 이런 날씨에 그냥 나갔다가는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거라고. 난 잦아들 때까지 여기서 좀 더 있다 가야겠어.”
사내가 가리키는 검은 우산을 집어들었다. 한눈에 보아도 낡아빠진 우산. 쓰고 나갔다가는 오히려 이게 너덜너덜하게 찢기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간단히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한 발짝 나오는 순간, 생각보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나도 모르게 놀라 뒤로 움찔 물러섰다. 낡은 우산을 반사적으로 펼쳤다. 탁, 타닥, 타닥. 빗물이 요란스레 우산을 때렸다.
후우, 잠시 숨을 고르고 우산을 쳐들었다.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럽게 내리는 폭우를 뚫고, 희미한 빛이 내 눈에 닿았다. 클럽 일리아스. 모두가 잠든 시간에 비로소 불을 가장 밝게 켜는 곳. 내가 가야 할 곳.
하지만 얇디얇은 우산 하나에 몸을 맡기고 두꺼운 비의 장막을 찢고 달릴 자신이 없었다. 서둘러 가야 하는데, 어떡하지. 우산 손잡이를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며, 아른거리는 일리아스의 불빛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은 불빛에, 귀는 빗소리에 열어둔 채 멍하니 서 있는데, 무언가 다른 소리가 내 귀에 닿았다. 예고도 없이.
목소리였다. 네 목소리.
“사랑하고 싶은 거잖아. 사랑해, 지금 사랑해.”
으르렁대는 장대비를 뚫고, 음절 하나 하나가 날카롭게 꽂혀 들어왔다. 어느새 내 발 앞에 가득 고여 흘러가는 빗물 같은 피아노 선율을 타고, 번쩍이는 번개처럼 예리하게 내리꽂는 너의 목소리.
“키스하고 싶은 거잖아. 키스해, 지금 키스해.”
빗방울이 우산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탁, 타닥, 타닥. 네 목소리를 끊어내는 그 소음이 신경을 건드렸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나는 우산을 팍 접어 버렸다.
“노래하고 싶은 거잖아. 노래해, 지금 노래해.”
한층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분노, 간절함, 열정, 그리고 사랑. 그 모든 것이 녹아 있는, 아니, 그 모든 것의 총합보다도 큰 목소리. 쏟아지는 빗물이 우산을 때리듯 너의 목소리는 내 심장에 빗발쳤다. 지그시 눈을 감고 차디찬 캔디숍 돌벽에 머리를 기댔다. 나를 흔드는 너의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뜨거웠다.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한 발이 물웅덩이를 박차고 내 몸을 비의 장막 너머로 던져넣었다.
“소리치고 싶은 거잖아.”
차가운 빗줄기가 온몸을 쓸어내렸다. 마치 내 심장을 태우는 그 불꽃을 꺼 버리겠다는 듯이. 그러나 그보다 훨씬 뜨거운, 한층 더 높아진 네 목소리는 타오르는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달음질하는 두 발이 한껏 분주해졌다. 불빛이 점차 가까워졌다.
“소리쳐, 지금 소리쳐!”
이제 너의 목소리는, 칠흑 같은 밤하늘을 찢고 울리는 우레와도 같다. 쉴 새 없이 거세게 쏟아지는 빗소리, 고인 빗물을 소란스레 밟으며 뛰어가는 발소리, 그리고 너의 목소리. 이 모든 소리가 섞여 들며 하나의 거대한 외침이 되어 나를 휘감는다. 퍼붓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일리아스 불빛을 향해 나는 달려간다. 이 비는, 그 외침의 형태다.
2.
애써 감았던 눈이 속절없이 다시 뜨였다. 쉬이 잠들 수가 없는 텁텁한 공기. 이 무더위 한가운데서도 평온히 잠을 청하는 다른 이들이 놀라우면서도 부러울 따름이었다. 쏴아, 쏴아, 끊임없이 쏟아지는 장맛비 소리를 뚫고 로쇠 녀석이 코를 고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지금 자 두지 않으면 피곤해서 내일 몸이 잘 움직이지 않을 텐데, 그럼 골빈당 재주꾼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 스스로를 타이르며 도로 잠을 청하려 들었다.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러나 빗소리가 재워 주리라고 믿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리는 더욱 청량한 메아리로 남아 나의 귀에 머물렀다. 그 잔향은, 더 이상 예사로운 소리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나리. 이 궂은 날에 나오시게 하여서...”
잊을 수 없는, 잊힐 리 없는, 그대의 목소리.
눈이 별안간 번쩍 뜨였다. 나리, 나리... 흐르는 빗물에 녹아 스러질 것만 같은 그대 목소리의 조각을 붙잡으려 애를 썼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잔뜩 머금은 양 온몸이 무거웠다. 신음 섞인 한숨이 새어나왔다.
홑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일어났다. 옆에서 곤히 주무시는 십주 형님을 깨울세라 발끝으로 조심조심 걸어, 툇마루로 향하는 문에 다다랐다. 빗방울이 저들끼리 요란스레 떠들며 창호지를 뚫을 듯이 두드려대었다. 나는 문득 양미간을 찌푸렸다. 선명하게 들려 왔다. 그날의 소리가, 다시. 탕탕탕, 탕탕.
“기선아, 너 이 녀석, 어서 문 열지 못하겠느냐?”
애꿎은 문고리만 만지작거렸다. 덜그럭 덜그럭, 문고리와 문살이 맞부딪치며 둔탁한 울음을 내었다. 마치 그날의 나처럼.
“못 엽니다. 아니, 안 엽니다! 아버지께서 어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내가 그간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그 계집은 감히 너와 말도 섞어서는 안 될 신분이라고! 그 천하디 천한 것이 제 분수도 모르고 계속 남의 집 귀한 독자를 건드리려 하는데, 내가 아비로서 어찌 가만 보고만 있겠느냐? 이제 너도 다 알만 한 나이거늘 웬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느냐!”
쏴아, 쏴아, 그칠 줄 모르는 비가, 마치 그날 아버지의 호통에 묻힌 나의 서러운 눈물 같았다. 서슬 퍼런 아버지의 나무람이 두려웠던 어린 내 입은 그저 끓어오르는 울음만 연신 삼킬 뿐이었다. 문고리를 틀어쥔 손이 떨렸다. 입술을 윗니로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이라면, 그때 미처 입 밖으로 쏟아놓지 못한 내 설움과 한을 다 풀어낼 수 있을까.
도대체 신분이 무엇이기에 내가 인애하는 이를 이리도 매정하게 쫓아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인데 왜 그리 갈라져 살아야만 합니까?
이것이 정녕 날 위한 길입니까?
이것이 정녕 당연한 일입니까?
수없이 눈물에 묻어 두었던 질문과 원망을 토해내듯,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눈앞이 흐릴 정도로 거세게 내리꽂는 장맛비가 우르릉우르릉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내가 차마 다 토로하지 못한 울분을, 퍼붓는 빗줄기가 대신하여 주는 것만 같았다.
툇마루에 풀썩 걸터앉아, 허리춤에서 부채를 꺼내어 펼쳐 보았다.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몰래 집을 뛰쳐나와 이 골빈당이라는 이름으로 지내며 백성을 위한 자유를 외친 지도 벌써 몇 해인가. 한데 돌이켜 보면, 과연 내가 원하는 자유를 외친 적은 있었던가.
천천히 허공에 부채를 부쳤다. 그날, 걸어닫은 작은 방 안에서 홀로 삭인 나의 아픔을 바람에 태워 보내 빗물에 녹였다. 비야, 나 대신 외쳐 다오. 어리고 겁 많아 자기 본심조차 내어놓을 수 없었던, 인애하는 이 하나 지킬 수 없었던 부끄러운 나 대신 소리를 질러 다오.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게 말이다. 부채 바람에 태운 나의 마음을 전하여 듣기라도 한 듯, 나직한 우렛소리가 울리며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툇마루 안으로 슬며시 비가 들이쳤다. 부채를 접어 다시 허리춤에 꽂아넣고 고개를 들었다. 눈가와 뺨에 물이 방울졌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