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Epilogue: 하늘에서

뮤지컬 <아킬레스>를 추억하며

by 서빈들

* 해당 글은 뮤지컬 <아킬레스>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되었습니다.
* 결말 이후를 그리는 에필로그성 단편이기 때문에, 글에 강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Epilogue: 하늘에서> by JaneyJ
- <아킬레스>를 추억하며.

*

없다, 이곳에는. 화려한 무대도, 환호하는 군중도, 빛나는 조명도. 그래도 좋다. 오히려 홀가분하다. 후회는 없다. 나에게 허락된 저 땅에서의 시간 동안 나의 목소리를 온전히 쏟아내었으니.
그런데 어쩐지 조금은 쓸쓸하다. 스포트라이트도, 환호성도 없어도 좋다. 다만 내가 이 곳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반기러 나올 누군가를 기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 홀로 서 있자니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완전히 혼자,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 멀리서 얇은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형체.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누굴까. 은근한 기대와 긴장이 한데 뒤섞여 나를 휘감았다. 다가오는 그를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안개가 조금씩 물러갔다. 순간, 어딘가 매우 익숙한 금발이 눈에 닿았다. 잘 익은 황금빛 밀이삭을 닮은 머리칼. 걷힌 안개 사이로 살며시 비쳐드는 햇살을 받은 머리칼이 한층 더 밝게 빛났다.
설마. 별안간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흔들리는 내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옮겨갔다.
길고 가느다란 술이 촘촘히 달린 흰 자켓.
비록 군데군데 검붉게 얼룩진 흔적이 가득했지만, 나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밀물이 밀려오는 바닷가처럼 내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쉴 새 없이 떨리는 입술이, 아주 오랫동안 부르지 못한 네 이름을 터뜨렸다.

"파트로클로스!"

너는 싱긋 웃으며 양팔을 펼쳤다. 내가 기억하는, 그 마지막 모습 그대로. 나는 너의 품 안으로 뛰어들듯 안겼다.
있는 힘껏 너를 꽉 끌어안았다. 잠시 휘청이다 중심을 잡은 네가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를 듣자 울음이 터졌다. 흐느끼며 너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꽉 쥐었다. 그날, 일리아스에서 네가 나를 붙들었을 때보다 더 세게. 다시는 그때처럼 너를 혼자 두지 못하게.
네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내 어깨를 지그시 감싸쥐었다.

"울지 마."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눈으로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여긴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곳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꾹 다물고 나도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풋, 하고 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 입에서도 실없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린 그렇게 마주보고 한동안 웃었다. 웃음소리가 가까스로 잦아들자, 네가 그 깊은 눈동자를 내게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약속, 지켰구나. 고마워."
"약속?"
"그때, 그 약속."

순간 기억 속 시곗바늘은 그날로 빠르게 돌아갔다. 네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잊지 말고, 계속 노래해 줘.'

네 목소리가 서서히 물결처럼 퍼지며, 내가 세상에서 쏟아낸 나의 목소리, 나의 노래를 하나 둘 기억으로 불러왔다. 나의 목소리의 조각들을 추억하며, 시곗바늘을 천천히 지금으로 돌아왔다.

그래, 파트로클로스. 내가 지켰어, 그 약속을.
그리고...

"너도,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파트로."
"내가?"
"응. 여기, 우리가 다시 만났으니까."

내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너의 눈이 불현듯 커졌다. 잠시 뒤, 그 눈에 눈물이 슬쩍 고였다. 너는 다가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 그렇네. 나도 약속 지켰네. 내가 그랬지. 하늘에서... 만나자고."

우리는 그렇게 손을 맞잡고, 한동안 말없이 서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문득 내 시선이, 네가 입은 너의, 아니 나의 자켓으로 옮겨 갔다. 곳곳에 자리한 검붉은 얼룩 한가운데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손을 뻗어 그 중 가슴께에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는 얼룩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 아프지 않아?"

네가 씩 웃었다.

"안 아파. 내가 말했잖아. 여기는 아픔이 없는 곳이라고."
"그래도, 그 때는..."
"... 그 때도, 아프지 않았어. 그냥 나는... 널 떠나보내는 게 더 아팠거든."

네 눈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톡, 하고 조용히 떨어졌다. 애써 묻어둔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눈물 사이로 네 얼굴이 비쳤다. 최대한 담담하려 안간힘을 쓰는 얼굴. 네가 내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다시, 돌려줄게. 그 날 가져갔던 너의 목소리를."

네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네 입술이 나의 입술과 맞닿았다. 여전히 따스했다. 그 때처럼. 네가 입술을 뗀 뒤에도, 그 따스함은 머물러 있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네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아킬레스."

내 이름을 부르는 너의 목소리.

"... 자, 이제 너의 목소리로 나를 불러 줘. 내가 돌려준 너의 목소리로."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나의 목소리가 끓어올랐다. 나의 목소리가, 눈물을 삼키며 굳게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파트로클로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하늘에서, 다시 만나.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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