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가을, 겉옷, 우리의 言語

Motive: 뮤지컬 <라 레볼뤼시옹> - 홍규의 일기를 엿본다면

by 서빈들

가을, 겉옷, 우리의 言語


by 서빈들


*


檀紀 4217年 10月 10日



궐에 울긋불긋하게 찾아왔던 가을이 이내 스러져가는 시간이 도래했다. 회랑을 둘러 수놓은 듯 늘어선, 며칠 전만 해도 앞다투어 제 잎의 색을 뽐내던 단풍나무며 은행나무가 이제는 힘을 다하여 말라 비틀어진 그것들을 속절없이 떨구어 낸다. 초조히 땅을 내리밟는 내 발 밑에 그득한 낙엽. 문득 발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금 이렇게 내 발에 의해 짓이겨지고 있는 너희가, 곧 내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거사(巨事)가 실패하면, 나의 숨은 낙엽보다도 하찮기 그지없게 부스러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직은 그 때가 아니다. 아직은 내가 내 숨을 짓밟기엔 너무 이르다. 아직까진 질기게 붙어있는 숨이 하아, 하는 맥없는 소리와 함께 입 밖으로 새어나와 기다란 연기를 만들어냈다. 아, 연기를 보아하니 벌써 날이 몹시 쌀쌀해졌구나. 새삼 실감이 났다. 하늘에 흔적도 없이 녹아들어가는 희뿌연 연기를 멍하니 쳐다보는데, 별안간 화사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날아들어왔다.


“홍규.”

“아, 왔나.”

“오래 기다렸어?”


네가 늦었을 리는 없을 테다. 원표 말에 따르면 너는 시간을 엄수하기로는 시계보다도 정확하댔으니. 샌님처럼 으스대기를 자주 하는 녀석이기는 하나, 내게 전해주는 말 자체는 거짓인 적이 없었기에 그 말을 믿는다. 네가 늦은 것은 아니고, 내가 이르게 온 것 뿐이지. 그런데 왜 그리 이르게 왔을까. 나는 얼마나 기다렸을까. 나조차도 답할 수가 없는 질문이 안에서 피어올랐다. 괜스레 어지러워지는 마음에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 오래는 아닌 것 같아. 시계가 없으니 알 수가 있나.”

“제시간에 맞추어 온다고 부지런히 온 건데, 당신이 이리 일찍 나와있을 줄은 몰랐지. 본의 아니게 기다리도록 만든 것 같아 면목이 없네.”


머쓱하다는 듯이 미소지어 보이는 네 얼굴에 잔잔한 홍조가 떠올라 있다. 인정전을 화려한 붉은빛으로 덮었던 단풍이 떨어지다 네 뺨에 내려앉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이, 마치…….

아니, 지금은 이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내가 애초에 이 자리에 온 이유도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대의(大意)를 위해서다. 자세를 고쳐잡아 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문서는.”

“아, 여기.”


너는 치마폭을 조심스레, 그러나 신속히 뒤적이다 곧 내게 정갈히 접힌 종잇장을 쥐어준다. 주먹 쥔 손에 들어앉은 그것을 나는 즉시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냇가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징검다리를 무사히 하나 더 넘었다. 아직 넘어야 할 바윗덩이는 더 남아 있지만.


“…… 수고했어.”

“별말을. 이제 또 급히 가 보아야겠네.”


네 목소리는 명랑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도 묻어난다. 내가 제대로 느낀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감정이 이성을 앞서서는 안 되는 시기야. 주머니 속 문서가 도망하지 않았음을 손끝으로 확인한 후 발길을 돌리려는데, 설핏 네 옷차림에 시선이 갔다. 정말, 나도 모르게.


“서도, 옷이…….”

“무슨, 문제라도?”


의아하다는 듯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맑은 눈동자가 나를 마주한다.


“아니, 문제가 될 것이야. 단지, 그, 춥지는 않은가 해서.”

“그런 뜻이었어? 마마께서 맡기신 일이 오늘 유독 많아서 급한 불만 끄고 뛰어 나오느라 내실에서 입던 차림 그대로이기는 하지. 확연히 날씨가 더욱 추워진 것은 맞는 듯하네.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아.”


너는 으레 그 멋쩍으면서도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괜찮아, 라고 네가 말하였지만, 네 몸이 전하는 언어는 입이 전하는 언어보다 때로는 더 진실하다. 가늘게, 하지만 명확히 떨리는 어깨. 인정전의 단풍보다도 더 붉게 물들어가는 귀끝. 입을 열 때마다 입에서 몽글게 피어나는 연기.


“돌아가는 길은, 정말 괜찮겠나? 인정전에서 예까지는 거리가 다소 되지 않는가.”

“이제 어린아이도 아닌데, 뭐 어떻겠어.”


내가 쓸데없는 걱정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 너는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나는 쉬이 눈길을 떼지 못한다. 네 어깨에서. 네 귀끝에서. 네 입가에서. 왜일까.

내 상념은 내게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조종하듯 움직인다. 어느새 내 손은 내가 걸쳤던 겉옷을 벗겨 들고 있다.


“서도.”


홀로 있을 때는 한숨을 토해내던 입이, 마주 있으니 네 이름을 토한다. 내 부름에 반응한 네 눈이 금세 내 손에 들린 겉옷으로 향한다. 네 눈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역시 네 몸의 언어는 숨길 수가 없이 순수하다.

네게로 걸음을 가까이 옮기기 시작했다. 어울리지 않게 쭈뼛거리는 발걸음. 열혈 행동대원이라는 자가 이게 무언 모양인가. 스스로도 어딘가 우습게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얕은 헛웃음을 내뱉어 보았다. 거리는 점차 좁혀진다. 떨리는 네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날이 많이 차다. 이거라도.”


겉옷을 네 손으로 넘긴다. 혼란함이 깃들어 차마 쥐지 못하는 네 손에, 황톳빛 겉옷은 얌전히 머물러 있다. 침묵만이 잠시 머무르는 가운데, 바람이 낙엽을 이리저리 휘저어 우리의 발치를 쓰다듬는다. 간질간질하다.


“홍규, 그래도 이건…….”

“흙 얼룩이 신경이라도 쓰이는가? 여기저기 구르는 행동대원의 옷이라 깨끗하지는 않지만 불결하지도 않아.”

“그런 의미가 아님은 당신도 알지 않아.”


어색한 공기를 대수롭지 않은 말로 깨 보려고 시도했는데, 무언가 잘 되지 않은 것 같다. 네 표정은 여전히 진지하고, 네 눈동자는 여전히 파도친다. 겉옷이 걸린 네 손이 어쩐지 내 쪽으로 조금씩 더 뻗어나오는 듯 보인다.


“도로 받아. 나는 그래도 궐 안에서지만, 당신은 밖으로 더 먼 길을 가야 하잖아.”


눈을 한번 깜빡이니 겉옷은 어느새 다시 내 손에 들려 있다. 아니, 이번에는 내 손에서도 얹혀 있다는 편이 더욱 정확하겠다. 미묘하게 긴장되어 보이는 네 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손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어찌해야 하나. 스쳐가는 찰나의 고민은 눈에 다시금 들어온 네 몸의 언에 의해 몰아내어진다. 떨림이 더욱 명백히 보인다. 이제는 추위뿐만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겉옷을 네 손으로는 옮겨주지 않았다. 대신 네 뒤로 조심스레 발을 옮겨 네 어깨 위에 슬며시 얹어 주었다. 미세하게 닿은 내 손끝에 무엇보다도 분명한 전율이 느껴진다. 네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보이는 것만 같다.

이제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진심이야.”


생각보다도 앞서 튀어나온 한 마디에 스스로도 소스라쳤다. 서둘러 옆으로 빠져나와 다시 너를 마주했다. 네 표정은 무어라 형용하기 힘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의 언어는 입의 언어보다 정확하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지금은 그리 말했던 나를 질책하고 싶다. 놀랐는지, 언짢은지, 성에 차는지, 그 무엇도 명료히 규정할 수가 없다.

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너를 바라보던 내게, 마침내 네가 입의 언어를 발한다.


“고마워.”


때로는 몸의 언어가 입의 언어보다 분명히 더 진실하다. 그러나 입의 언어만이 투명한 진심을 전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입가를 조금 끌어올리며 피워보인 미소보다, 어쩐지 붉은 기운이 더욱 밝히 보이는 뺨보다, 네 입에서 발화(發話)된 한 마디가 내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럼, 이만.”


황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잊고 있던 본분이, 임무가 사감(私感)을 차단했다. 주머니 속 문서가 나를 재촉하듯 바스락거렸다. 매정하리만치 빠르게 멀어지는 내 발걸음을 사라질 때까지 뒤쫓을 네 시선과 표정이 어떠했을지는 신경쓸 겨를이 없도록.


적막한 심야에 일지를 쓰고 있노라니, 낮에 있었던 일이 이리도 생생하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적힌 글자마저 평소보다 더욱 선명해 보인다. 너와 궐 담벼락 구석진 곳에서 나누었던 언어가 이 위에 빛난다. 인정전의 가을 단풍보다 형형하다.

일지를 덮기가 아까워 어쩌면 상 위에 펼친 채로 잠을 청할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이만 줄인다.


獨立. 開化. 萬民平等.


*


- 2021.12.04

뮤지컬 <라 레볼뤼시옹> 합작 참여 작품

https://everymusical.wixsite.com/la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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