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함 앞으로 세 발짝.
하나,두울,세애엣...쓰으읍...호흡을 가다듬고 관리비 청구서를 열어 본다.
어이쿠야. 200 kwh를 넘겼네. 아슬아슬했는데.
나의 작은 다짐 중 하나. 200 kwh는 넘지 않도록 신경 쓸 것. 7월분이니 8월분인 다음 달엔 300 kwh도 넘겠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시큼털털한 아쉬움 대신 빙싯거리게 된다.
최근 몇 년을 통틀어 전기 사용량 200 kwh 넘긴 7월은 이번이 처음이다. 항상 8월만 조심하면 되었는데. 문제는 건조기. 그러니까 의류건조기든 식품건조기든 암튼 건조기가 원인이다. 의류건조기는 십 년을 넘게 망설이다 작년 6월 들여놓았다. 먼지에 유난히 민감해 수건을 사용할 때마다 코가 간질간질했다. 어느 날인가 재채기를 연발하는 내가 더럽게 느껴져서 눈 질끈 감고 질러버렸다. 암튼 요 녀석은 요물이고 보물이다. 잘 조절해서 사용 중이다.
이번 200 kwh을 넘기게 한 주범은 다름 아닌 식품건조기다. 에어컨은 7월 동안 켠 적이 없었으니 아닐 테고. 식품건조기를 돌리면서도 한구석이 쫄깃쫄깃했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다 이분 덕이다. 수묵화 교실의 70대 센 언니. 처음 뵈었을 때다. 나보다 일찍 오셔서 당황했다. 10시 수업. 나는 보통 9시 30분이면 도착한다. 그러면 이분은 당최 언제 오시는 걸까. 암튼 책상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니. 그 센 언니 양팔에 빨갛고 퍼런 문신이. 뜨아. 손목 위부터 팔꿈치까지 온통 현란하고 무시무시한 그림으로 꽉 채워져 있다. 이삼십 대 뮤지션이나 아티스트라면 이해가 되겠지만. 70대 어르신은 어떤 과거가.. 또르르.. 눈동자 굴리지 말고. 정신 차리고 침착하자. 당황한 거 티 나면 안 돼. 자연스럽게. 후아후아.
문신을 본 이후로 난 그분을 센 언니라 칭하며(맘속으로. 아무도 모름) 살살 눈치 보고 있다. 내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5m쯤 떨어진 가깝기도 멀기도 한 어정쩡한 거리에 그분 자리가 있다. 그런 거 아실까. 누가 자꾸 날 지켜본다는 느낌적인 느낌. 난 좀 치다 그런 싸한 기운이 들어 고개를 번쩍 들면 문제의 센 언니와 눈이 마주치곤 한다. 하아아. 나 찍힌 거니. 그럴 때마다 흐어어 흐어어 나 바보예요. 아시겠죠. 이런 빙구미소를 어색하게 날려 보내곤 한다.
k 어르신의 특징이 있다. 물론 각오하고 있었지만 후욱 갑자기 치고 들어오면 살짝 아주 미세하게 짜. 아. 증. 아니 뭐 그런 불편한 감정이 일기도 하고.
"애가 왜 없어?" "이제라도 낳아야지?" "요즘은 육십에 낳는 사람도 있다구. 오십이 면 새댁이야."
맞다. 이 문제를 납득시키지 않으면 만날 때마다 우리 부부 이부자리 속에 들어와 코치라도 할 기세다. 오늘이야. 합궁해야지.크어억.
내 나이가 만으로 49이다. 그러니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경험(납득시키기 위한)이 있었겠나. '두 번 유산 후 안 생겨요.' '딩크예요.' '유학 보냈어요.'이런 레퍼토리의 반복이지만 앞의 두 건으론 어르신들의 지대한 관심을 끊어낼 수 없었다. 마지막 유학은 거짓이 거짓을 낳는다고 내가 딸을 낳았었나 아들이었던가를 시작으로 미국이었나 아니다 영국이었지 하는 극심한 혼란을 만들어 냈다.
마침내 수묵화 교실에서도 내 무. 자. 녀. 가 그분들의 관심사가 됐다. 그렇지만 전처럼 당황하지 않는다. 내겐 필살의 무기, 아니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니, 아. 직. 애가 없으면 어떻게 해?"라며 나를 새댁 취급하는 고마운 어르신께 "저 자궁이 없어요~."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순간, 관심 없어하던 분들도 일제히 나를 향해 눈을 모아 주시는 게 아닌가. 자궁 없는 여자를 처음 보는 것일까. 저 짠한 눈빛은 뭐지. 기분이 나쁠까 말까 고민되는 순간. 그때 센 언니께서 한 방에 정리하였다. "이봐, 이래서 노인네 소리 듣는 거야. 프라이버시 몰라? 하던 거 마저 들 하라구."
또 그 느낌이다. 날 지켜보고 있다. 고개를 들지 마.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왜 뜬금없이 구지가가 떠오르는 걸까. 결국 뭔가에 이끌리듯 고개를 들고 말았다. 역시 센 언니다. 나는 이번에도 빙구 미소로 응답했다. 흐어어 흐어어.
"개 키운다며?" 센 언니가 물었다. 나는 그 또래 어르신의 반려견에 대한 탐탁지 않음을 익히 아는지라 자신 없어하며 답했다. "네, 검정 푸들 키워요." 이윽고 센 언니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더니 내 쪽으로 큰 봉지를 건네었다. 응? 이건 개껌인데. 동물 병원 전용 상품이다. 큰 봉지에 낱개로 20개쯤 들어 있고 하나하나 개별 포장되어 있는 고급 개껌."우리 개가 늙어서 못 먹어. 아주 비싸게 줬는데 아깝잖아." 하신다.
집에 와 개껌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이거 새건대. 아예 뜯지도 않은걸. 다른 거로 바꾸면 되지 왜 주실까. 그렇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스몰 에이, 아주 작디작은 새가슴이다. 거기에 더해 '안 주고 안 받기' 종목의 선수라도 되는 양 이쪽에 진심이었다. 왜 과거형을 쓰는가 하면 나는 쿨병 말기 환자였다가 이제는 초기쯤으로 호전된 상태다. 그러나 '안 주고 안 받기'가 참이라면 이것의 대우인 '받으면 준다'도 참이다. 그렇지. 난 뭔가를 줘야만 한다.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센 언니잖아.흐으윽.
센 언니의 '우리 개가 늙어서 못 먹어.'가 귀에 메아리친다. 그렇다면 왕년의 솜씨를 발휘해 보도록 하자. 내겐 17살, 15살에 하늘로 소풍 간 반려견이 있다. 그 애들이 노견일 적 시중에서 파는 것은 씹지를 못해 손수 만들어 먹였다. 락토프리 우유와 단호박 그리고 한천가루가 필요하다. 단호박을 깨끗이 여러 번 씻어 찜기에 찐다. 가운데 속을 파내고 슴덩슴덩 잘라 우유와 함께 믹서로 간다. 이제 한천가루를 적. 당. 히. 넣어 (과하면 딱딱해지고 적으면 굳지를 않는다) 약 불에 한 삼십 분쯤 끓인다. 끓어올라야 하는데 약 불이니 삼십 분이 세 시간처럼 여겨진다. 여름이다. 불 앞에 서서 나무 주걱으로 바닥을 쉬지 않고 긁어줘야 한다. 자칫 마음을 놓으면 한천가루가 뭉치니 끊임없이 젓고 또 젓자. 실리콘 틀에 한 스푼씩 조심스레 넣고 굳기를 기다린다. 서너 시간 후 건조기에 하나하나 살짜기 얹어 놓고 12시간 60도로 맞추면 끝이다. 과연 끝일까. 흠. 흠. 중간중간 앞뒤로 뒤집어 주고 말랑한 상태가 되었는지 불심검문도 잊지 말아야 한다. 노견이 먹기에 알맞은 쫀득하면서도 딱딱하지는 않게. 하아아. 시간이 갈수록 집은 더워진다. 건조기는 윙윙 거리며 뜨건 땀을 배출하고 있다. 더불어 콩이는 얼른 내어 놓으라며 치근덕 거린다. 저리 좀 가라. 고만 좀 엉겨. 덥다. 더워. 보통 900ml 우유에 12시간 걸리는데 1800ml이니 오늘 잠은 다 잤나 보다.
센 언니가 보인다. 역시나 나보다 먼저 오셨다. 얼려 둔 우유 껌을 가방 속에서 조심스레 꺼내 더 조심스레 전달했다."락토프리로 만든 우유 껌이에요. 냉동실에 두고 먹이세요." 오늘은 에어컨 때문에 추우신지 긴팔 옷을 입으셨다. 다행히 문신은 숨어있다. 언니께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이리 와 보란다. 쭈뼛거리며 다가가 보고야 말았다. 헐. 이런 분이셨어? 족히 허리까지 높은 더블 매트리스의 아메리칸 스타일 침대. 그 위 폭신한 푸딩 같은 하얀 이불에 강아지가 앉아 있는 사진이다. 강아지 자랑을 하고 싶은 신 거였지만 내 눈엔 하얀 벽과 더 하얀 침구 그리고 기둥이 네 개인 진한 밤색 원목 침대만 보인다. 벽엔 소담한 수묵화 두 점이 걸려있다. 전시회에 가셨다가 눈에 쏙 들어와 구입하셨단다. 그 연세의 방에 늘 보이는 약병도 호랑이나 달마 도사 그림도 은행에서 받은 긴 달력도 없다. 절제미. 오오오 미니멀리스트란 말인가. 나와 동족이시구나. 이런 멋쟁이 언니라니. 아냐. 정신 차려. 이분은 센 언니라고. 암튼 또 강아지 간식을 꺼내더니 가서 먹이란다. 미개봉 새 거를 또 들이민다. "우리 개가 못 먹어. 그 집은 잘 먹지?" 나는 이번에도 거절할 타이밍을 놓쳤다. 흐윽.
그렇다. 이번엔 쿠키다. 부서지기 쉬운 촉촉한 쿠키를 만들어야 한다. 고구마와 닭 가슴살 그리고 블루베리와 당근이 필요하다. 다시 건조기는 위이잉위이잉 휘파람 불며 열일 중이다. 집안은 점점 한증막이 되어 간다. 숨쉬기가 곤란하다. 나의 수고스러움이 다른 이에겐 행복일 수 있다. 여기 우리 콩이는 그래서 살판이 났다. 아직 젊디 젊은 콩이에겐 이런 부드러운 간식은 안 만들어 주는데 말 그대로 노 났다.
좀 곁을 주고 사는 맛이 이런 건가.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하다. 뭉근한 따뜻함이랄까. 어릴 적 아랫목 이불속에 숨겨 둔 밥공기와 같은 온도. 더운 김을 내뿜는 건조기를 앞에 두고 싸목싸목 먹는 노견이 떠올랐다. 조금씩 떼어 먹이는 센 언니의 모습도 보였고. 그러자 인중에 맺힌 땀방울도 싫지만은 않았다.
사실 거부할 수도 있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아마도 그랬겠지. 웃으며 친절하게 거절했겠지. 중증의 쿨병에 걸려 오고 가는 정은 거추장스럽다고 여겼겠지. 다행히 지금은 아니다.
아, 그리고 비밀을 알았다. 센 언니의 그 문신. 알고 보니 팔 토시였다. 내 나쁜 시력이 오해를 한 것이다. 어쩐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오해했던 한 달 동안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센 언니의 과거를 그려보는 낙이 있었는데,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