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이어지는 한파는 육체도 정신도 움츠러들게 한다. 요 며칠 아주 옴짝달싹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기어코 외출을 감행하겠다고 의지를 불사르지만 창밖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 모습은 나를 다시금 멈칫거리게 만든다. 이러다가는 오늘도 그냥 그런, 어제와 비슷한 하루의 반복이겠구나 싶다. 아직 날것인 오늘이 이미 살아 본 과거의 어느 하루 같다. 오전인데 마음은 벌써 시들하다. 메모지에 심드렁하게 끄적이며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는구나. 꼭 죽을 날 받아 둔 할머니 같네...' 하며 한숨이다. 이쯤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추위는 단지 핑계에 불가하다.
이십 분쯤을 걸어 도착한 독립 서점. 지난여름부터 와보려고 벼르던 곳인데 그때는 더위 때문에 미뤄뒀다. 이번에는 추위 때문에 망설였으니 아마도 나는 날씨에 휘둘리는 사람인가 보다.
작은 여닫이문을 밀어 들어서니 주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어서 오세요." 한다. 흔하디 흔한. 방문하는 상점에서 으레 듣는. 그래서 아무 감흥 없이 이제 내 쪽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응수하지만 나 또한 진심으로 상대의 안녕이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닌 그저 그런 인사치레의 말. 그런데 젊은 사장의 짧은 인사가 생생하다. 살면서 경험한 수많은 '어서 오세요.'중 이처럼 신선한 '어서 오세요.'는 처음이다. 젊은 사장은 정리하던 책을 내려두고 환하게 웃으며 나와 눈을 맞춘다. 그러고는 정성스럽게 조금은 조심스럽게 말하며 마치 약속이라도 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한다.
"이런 게 환대구나...' 기분 좋은 찌릿함이 손끝에까지 전달된다.
세로로 긴 작은 책방은 사면 곳곳이 책으로 실팍하게 정리되어 있다. 생일 책이라 불리는 이곳의 시그니처 책 표지에는 날짜만 적혀있다. 책 한 권을 통으로 포장해서 진열하기에 제목도 작가가 누구인지도 알 길이 없다. 문장 한 줄 읽어보지 못하고 책을 사야 하나 싶어 살짝 곁눈질해 보니 사장은 여전히 포장 중이다. 어쩐다. 나와 같은 날 태어난 작가의 작품이 어떨지 궁금하지만 꼭 이런 모험을 해야 하나 싶은 것이, 망설이게 된다.
"사장님, 이렇게 꽁꽁 포장하니 어떤 책인지 모르겠어요. 읽다가 실망하면 어쩌죠?"
내 질문에 사장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눈을 맞춘다. 그의 무해한 눈이 반짝인다.
"책방 주인 잘못이죠. 그럴 때는 저를 욕하세요."
친절한 자신감이랄까.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대답인데 믿고 싶어진다.
비밀스러운 생일 책과 톨스토이 문학상의 김주혜 작가가 친필 사인한 책을 구입하고 돌아서는 길, 여운이 잔잔하다.
낮에 별을 본 기분이 이럴까. 어떤 책에서 읽은 글귀인데 이제야 이해하겠다. 태양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저기 멀리 별 무리는 있다. 빛에 가려 숨은 무수한 별들 속 홀로 빛나는 사람. 그 별의 삶의 태도가 전해진다.
돌아오는 길에 단지 내 단골 정육점에 들렀다. 아직은 단골인. 제육볶음용 돼지 앞다리 1킬로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진열장 안을 구경하려는데 난감하다. 냉장고도 냉동고도 안의 상품이 보이지 않게 광고용 천 같은 것으로 둘러놨다. 어제 닭고기 살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의아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주인의 얼굴색은 어둡다. 언제부터 인지 가게도 사장도 먼지 쌓인 거울처럼 빛을 잃어간다.
처음 방문할 당시엔 활기로 가득 찼다. 남자 셋이 운영을 했는데 누가 주인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모두 적극적이었다. 이런저런 스몰 토크로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고 고기는 맛이 좋았다. 이제는 그중 한 명만이 남았다.
주인은 "1킬로 약간 넘는데 괜찮으시죠?" 한다. 예상했던 레퍼토리이다. 몇 달 전부터 줄어든 매출을 어떻게든 메꾸려 고안한 방법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매번 200그램 정도를 더 썰어 담으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래서 요즘은 필요한 양보다 적게 주문하곤 한다. 오늘은 두 근을 사려했고 1킬로를 주문하니 얼추 두 근에 가깝게 썰어져 있다.
모로 꽉 닫은 입과 내 눈을 피하는 눈동자를 보며 카드를 건네는데 '오죽하면...'이란 말이 떠오른다. '그래, 오죽하면...' 이 말은 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아내는 사람에게만 어울린다.
추운 날이 길어진다. 눈 돌린 곳곳 주인 없는 점포가 보인다. 서점이라고, 서점이어서 잘 될 리 없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덕분에 반짝 팔리던 책도 다시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어쩌면 독립 서점 주인도 매달 마이너스 통장으로 견디는 중인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 본 책방 주인의 눈빛이 귀하다. 인생을 겉돌지 않겠다는 다짐, 버티는 것으로 하루를 채우지 않겠다는 마음이 내게까지 와닿았으니 말이다. 좋은 눈빛은 밝은 에너지로 퍼진다. 그렇게 사람을 끌어들여 같이 빛나자고 한다.
오늘, 닮고 싶은 사람과 새 단골집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