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화를 잘 내지 않고 늘 웃는 얼굴인 사람이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돌변해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분하고 늘 타인을 배려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누르기 바쁘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쉽게 휘둘리거나 화내고 짜증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타인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민폐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애를 쓰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정이 폭발해 버려 그동안의 노력이 무산된다. 그동안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억지스럽게 잡아두고 쌓아둔 감정들이 주체하지 못할 분노로 바뀌어 터져 버리는 것이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지만 매번 참다가 터지고, 참다가 터지는 악순환을 반복할 뿐이다.
나 또한 감정을 스스로 잘 통제하며 살고 있다고 여겼다. 화를 잘 내지 않는 내 모습에 스스로 잘하고 있다 칭찬하기도 했다. 몇 년간 화 한번 내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살았노라 스스로에게 뿌듯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일순간에 무너진 사건이 있었다.
한 때 1년 정도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는 연인 이상의 편안한 사이로 발전했다. 늘 옆에 있었기에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평소 다투는 걸 좋아하지 않아 늘 참고 넘어가던 내가 조금씩 그 친구와 다투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다툼의 횟수가 잦아지고 강도도 점점 세지기 시작했다. 그와 다툴 때면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벽을 보고 대화하는 것처럼 내 이야기는 흘러가지 않고 벽에 탁탁 가로막히는 느낌이었다. 그와의 다툼은 점점 큰 싸움으로 번졌고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그에게 온 힘을 다해 악을 쓰고, 큰 소리를 지르며 분노했다. ‘눈이 뒤집힌다는 표현을 이럴 때 하는구나.’ 싶었다.
그런 내 모습이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고, 너무 싫었지만 그와 심하게 다툴 때면 어김없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폭발해 버렸다. 그 친구와의 이별은 그렇게 분노와 함께 맞이했다.
실컷 분노하고 소리치며 싸웠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분노의 씨앗이 꿈틀꿈틀 하고 있었다. 싸움이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서로 사과하고 상황을 해결해도 분노는 쉽게 가시질 않았다.
당시의 나는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기에 분노하고 소리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평소 감정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만 원래의 내 모습이며 분노하고 소리치는 것은 내 모습이 아니라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 또한 내 안에서 나온 것이기에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 그토록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분노했을까? 나는 단지 그와 싸운 다양한 상황적인 이유로 그렇게 악을 쓰며 분노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상황과 그에게서 분노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그가 잘못했고, 나를 화나게 만들 이유들이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다툼 시에 상대가 내 이야기를 충분히 공감하고 잘 들어주지 않아 화를 낸 것처럼 보였지만 내면을 깊게 보면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동, 느낌, 생각은 무의식 속 어떠한 원인으로 일어난다고 말했다. 억압되고 저장되어 있던 무의식은 어느 순간 수면 위로 떠올라 작동한다.
나 또한 무의식속에 억압되고 저장되어 있던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연인과의 싸움에서 폭발해 분출된 것이다. 사실 그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그 자체보다는 그러한 행동이 나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평소에는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어 잘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쌓여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일순간 폭발해 버렸다.
무의식에 쌓인 분노는 생애초기에 양육자의 태도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는다. 생애 초기에 부모로부터 애정, 인정, 보호 등의 신호를 적절히 받았다면 감정을 불필요하게 억압하거나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사랑의 마음과는 달리 방식의 차이로 아이에게 충만한 애정과 인정, 보호의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훗날 아이가 성인이 되어 삶을 살아가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과거를 되돌아봄으로써 내 삶을 불편하게 하는 감정의 원인을 깨닫고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스스로 올가미를 풀고 나와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양육자를 비난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나를 이해하고 스스로 인정하고 스스로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양육자를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풀지 못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서부터 자존감을 회복하고 억압된 분노를 조절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