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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괴벽, 특이한 습관

by 이각형

내게는 남들과 다른 특이한 습관이 하나 있다. 어찌 보면 상당히 괴벽과도 같기도 하고 또 다르게 보면 굉장히 고루해 보이기도 하다.



그 괴벽은 술에 취해 있을 때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술에 취하면 글을 쓰는 게 습관이다. 직장에서 회식이 끝난 뒤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서 글짓기에 여념이 없다.



불콰해진 얼굴로 핸드폰에 연신 문자를 찍어대는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쓰고 있을 때는 나는 알코올이 정신적 작용을 감퇴시킨다는 사람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 진다.



지금도 맥주를 마시고 펜을 굴리고 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건 글이 아니라 쓰레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마음이 울적한 나머지 요새 읽고 있는 책들의 제목이 하나같이 우울증 환자가 집을 만한 책들 일색이다. 삶이 힘들어질 때 뇌과학을 읽는다거나 삶을 견디는 기쁨, 인생론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에세이 같은 글들은 내게 심심풀이에 가까웠다. 의미를 주는 책을 발견하지 못해 잠시 쉬어가는 코너로 심심풀이로 읽었던 것들이 에세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공허한 마음이 굳어진 나머지 깊은 의미를 담은 글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질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굳은 땅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 적실 수 있는 것처럼 부드러운 문체로 쓴 글을 붙잡게 되었다.



에세이라고 무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헤르만 헤세라든가 에릭 블레어, 나쓰메 소세키가 쓴 에세이들은 현대의 그 어떤 작가 쓴 에세이보다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명확희 알고 있다.



최근에 유행하는 에세이들은 감성팔이에 불과한 한국적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데 그러한 출판문화가 유행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더 이상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으니 화려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서점을 찾는 사람들을 유혹하지 않고선 출판업이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찾지 않는 문화는 사람들의 이해력, 문해력 그리고 활자에 대한 지구력을 감퇴시키고 있다. 따라서 화려한 영상에 사로잡힌 현시대를 살아가는 평균인들의 지적 탐구활동의 수준을 감안한다면 감언이설에 가까운 에세이만이 독자에게 다가설 수밖에 없다.



지금 서점에 가서 진열된 책 제목을 살펴보자. 과연 철학이나 예술이 서점 안에서 차지한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면 지금 하는 말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18세기는 소설의 시대였다. 19세기는 과학의 세계였다. 20세기는 제2의 민주화의 시기였고 21세기는 과학기술의 시대이다.



19세기 과학이 세계를 지배하다가 20세기 초 과학자들이 새롭게 태동한 양자물리학 앞에서 한계에 봉착했을 때 서점에는 철학책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과학이 봉착했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철학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었다.



21세기는 인간성이 중요한 시대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현재 철학의 중요성을 등한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20세기까지 철학의 중심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이 무대였다면, 21세기 철학의 중심은 미국으로 옮겨졌다.



자본주의를 숭배하고 있는 미국에서마저도 철학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미국 자본주의의 하수인격인 대한민국에서는 철학이 말라 비틀어 죽어가고 있다.



현시대에 누가 과연 철학을 전공으로 삼겠는가? 의대나 공대에 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넘쳐나지만 인간의 근본을 세우는 철학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절망적으로 찾아볼 수가 없다.



고작 이렇게 나처럼 낡은 사람들이나 겨우 철학이라는 학문의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형편에 불과하다. 그런 나에게 딸아이가 저녁을 먹고선 이런 질문을 던졌다.



아빠, 아빠는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해서 잘 알아? 때마침 플라톤의 이데아에 관한 코플스톤 교수님의 글을 읽고 난 뒤였다.



그래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에서 설명을 해줬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나오게 된 배경을 말해줬다.



책을 쓰거나 이론을 설립하는 사람들은 문제의식에 의해 추동된 지적인 활동에 이끌린 것이다. 그 사람이 살아간 시대에 어떤 문제를 발견한 것이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수단이 바로 이론이자 그 이론을 집대성한 책인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정립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 그리스의 시대적 혼란을 이데아론이 태동한 배경으로 문제의식을 짚어준 뒤에 이데아론 그 자체를 설명했고, 이데아론이 후대에 이르러 후기 플라톤학파와 기독교적 사상에 미친 영향을 두루두루 일러주었다. 이러한 전후배경을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수능 언어영역의 지문이 지닌 단편적인 한계를 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철학에 관한 얘기를 딸아이와 나누는 나는 실제로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그저 철학이라는 학문의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한량에 불과하다.



눈발이 내리는 일요일 오전과 오후에 헤르만 헤세의 에세이 모음집인 "삶을 견디는 기쁨"을 읽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견디는 것을 기뻐한다니 이 얼마나 역설적이며 모순이란 말인가?



견뎌야 할 만큼 기쁨이라면 삶은 축복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삶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며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선으로 헤세의 글을 읽으면서 갑자기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어쩐지 헤세의 글은 따듯했다.



마치 지리산 자락에 들어서면 따듯한 어머님의 심정이 느껴지는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자상하고 애정 어린 숨결이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헤세가 우리 인류를 사랑해서 남긴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여학교 앞에 살면서 비록 여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뛰노느라 자신의 집필에 방해를 받았을지라도 여학생들의 활기에 감사를 표했던 헤세처럼 나도 이제 얼굴도 모르는 사람마저도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이렇게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우리는 어차피 다 같은 입장에 처한 존재이니까. 그만큼 우리는 고독하니까.



서로 사랑하자는 톨스토이의 말도 이제는 그의 모순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된다.


이 글은 플라톤, 헤르만 헤세, 나쓰메 소세키, 코플스톤 그리고 메시야를 작곡한 거장 헨델이라는 지적인 거인 덕분인 만큼 내게 공을 돌릴 만한 창의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며 붓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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