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의 삶이든 반드시 그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마치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요인을 그저 '운'이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이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와 그 실상을 위에서 관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독일인들은 약제사가 약을 가루로 빻는 순간에도 이 우주가 운용되는 그 의미를 되새긴다고 말할 정도로 인생의 의미에 심취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냐는 문제가 우리 앞에 동그라니 놓인다. 이때의 우리는 마치 식탁 위에 놓인 사과라는 사물의 의미는 되새기듯이 인생을 관조해야만 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서 삶의 의미가 충만해지는 순간을 심오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채 태어나지 못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서 자신이 원해서 스스로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이 없다는 데에 인간이 지닌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따라서 거대담론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어진 일상의 사소함에서 의미가 실현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해야만 한다.
분자의 세계에서 원자의 시대로 시선이 옮겨지고 더 나아가 미립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와 양성자 쿼크와 스핀으로까지 갈수록 세밀하고 사소함 속으로 파고드는 과학에서도 사소함의 의미가 결코 사소하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의 지적활동이 세밀해질수록 보다 더 미세한 차이에 주목해 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삼나무의 그림자 속에서 자연의 신비가 지닌 경이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는 인간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작은 일에 감사하지 못하는 인간은 배은망덕할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주어진 사회체제를 당연시 여기는 것만큼 무지한 일도 없을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해 입체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상처와 피해만을 직시하기 바쁘다. 손해를 봤다는 생각 앞에서 미덕이 지닌 가치는 퇴색되고 만다.
그것이 비록 그가 타고난 한계일지 몰라도 그것을 우리가 깨우쳐 줄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우리도 그저 한 목숨을 지탱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헤세는 우리에게 말해줬다. 시간에 쫓기지 말고 지금 바로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일들을 바라보면서 삶의 의미를 관조하고 기뻐하라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