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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존재

by 이각형



뇌과학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알게 되었다. 피험자에게 A와 B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A를 선택하면 100원을 받고, B를 선택하면 50%의 확률로 200원을 받고 나머지 확률로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이런 실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B를 선택하게 된다고 한다.

실험을 약간 변경해서 B를 선택했을 때의 기대값이 A보다 못하게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래도 사람들은 B를 선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젠 단위를 바꿔보기로 한다. A를 선택하면 100억을 100%의 확률로 받고, B를 선택하면 50%의 확률로 200억과 나머지 확률로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바꿔 버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A를 선택한다고 한다. 기대값의 가치가 더 중요해질수록 사람들은 안정성을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안정성을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한 편이다. 특히나 직업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직업을 갖기 위해서 자격증을 비롯해 소위 스펙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결국 안정성을 위한 것이다. 전문적인 일을 하고 싶다고 어려운 시험에 도전하는 것도 실제로는 직업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전문자격증은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그치긴 하지만, 전문성이라는 공고한 성탑을 쌓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소득의 안정성 더 나아가 한 인격체로서의 안정성을 다지기 위한 기반이다.

위의 재미있는 실험에서 우리는 소유와 존재라는 극명한 대조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소유와 존재에 관한 문제의식은 인간사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금액이 작은 실험에서 사람들은 기대값이 낮더라도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낮은 기대값의 차액에 해당하는 비용을 들여 게임을 즐기고 있다.

반대로 기대값이 커지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의사결정에서는 일신의 보전을 위해서라도 안정성을 선택한다. 다시 말해 안정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 이해 맨몸으로 태어난 인간의 입장에서 안정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심리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고인 물이 썩듯이 소유에 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이를 잘 아는 에리히 프롬 교수는 그의 유명한 책인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과제를 다뤘다. 그래서인지 그의 저서를 10여 년 전에 읽었을 때 굉장히 감명 깊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세기에 손꼽히는 저서들이 그러하듯이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의 시작도 약간 동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한다. 천재들은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착안한 생각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교훈을 남겨주곤 한다.

소유와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프롬 교수는 인간의 언어습관에 주목했었다. 언어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하곤 하는데 미국에서도 그러했던 모양이었다.

프롬 교수가 미국 사람들의 언어습관을 살펴본 결과 자본주의가 더 공고해질수록 사람들은 소유격 동사를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말하고자 할 때 그 행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동사를 제쳐두고 그 행위의 명사형과 소유격 동사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나는 꿈을 갖고 있어요"와 "나는 꿈을 꿉니다"의 차이를 발견했다. 영어로는 "I have a dream"과 "I dream to be..."으로 그 차이가 눈에 확연히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언어습관이 만연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굳이 소유를 의미하는 동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말에 "갖다"라는 동사를 사용해 "무엇 무엇을 가지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본주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의 변모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지한다고 한들 이미 익숙해져 있는 나머지 그것이 어떤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지, 어디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지루하다를 영어로 말할 때 boring이라고 하는데 이 표현 역시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하다. 그래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역사 수업을 통해 과거를 배울 때 과거인들은 지루해서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boring이라는 단어는 영어권에서 가장 먼저 문서화된 때가 고작 18세기 중반밖에 안 된다. 그 전에 영어권에서는 지루하다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세계인들 중에 영국사람들은 18세기 중반까지는 지루함을 모르고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지고 점차 고도화되면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전 농업경제시대에서 인간의 삶은 어떠했는가?

대부분의 인간은 그저 존재로서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로 잉여생산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뒤 인간은 소유로써 존재하기 시작했다.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전통적 권력자들이 차지했던 빈자리를 지식이든 부든 소유가 많은 사람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가 점차 더 발전하면서 막대한 자본을 소유한 사람이 사회계약으로 위임된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존재로서 존재하던 시대는 경험해보지 못한 채 소유로서 존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다른 선진국보다 자본주의로의 전환속도가 훨씬 빨랐던 우리나라의 경우는 급격한 사회변혁이 가져오는 폐해도 훨씬 큰 법이다.

소유로써 존재할 때와 존재로서 존재할 때에는 과연 어떤 차이가 발생할까? 아무런 차이가 없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호사를 부리는 일일까?

존재는 행복을 향유하지만 소유는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소유해야만 한다. 이 차이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한강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큰 소리로 웃어본 경험이 있었던가? 그렇게 웃고 있을 때 나는 과연 행복하지 않았던가?

아무도 없는 광활한 바닷가를 거닐면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수평선을 바라보며 한적하고 고요한 행복감도 느끼지 않았던가? 깊은 산속에 난 오솔길을 걸으며 바지에 쓸리는 수풀소리와 커다란 소나무의 우듬지 위에 불어대는 바람의 소리만 들리는 곳에서 자아가 충족되는 기분을 느껴보지 않았던가?

물론 기억이 안 날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히 행복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행복한 웃음을 소유할 수는 없다.

행복했던 시간은 소유할 수 없다. 그저 기억으로 추억할 뿐이다.

그저 그 시간에 친구들과의 나눈 대화를 웃음으로써 향유했을 뿐이었다. 반면에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믿고 어떻게든 손아귀에 넣으려고 노력했던 때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과연 그때 행복했던가? 소유로써 존재하는 삶이 많은 현대인들이 지향하는 삶일지 몰라도 진정한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향유함으로써 존재할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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