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든 것에 관하여 모든 사람에게 죄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

by 이각형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는 독자들에게 감명 깊은 유훈을 남겨주는데 정말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능할 때마다 떠올리는 말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에 관해 모든 사람에게 죄인입니다."




모르긴 해도 이 문장을 읽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내가 왜 죄인이라는 거야? 그것도 모든 것에 관해서라니?" 라며 반대의 뜻을 표할 것이 틀림없다. 특히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법을 어긴 적도 없이​ 공중질서를 지키며 살아왔고, 살인도 사기도 도둑질도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왜 죄인이라는 거냐며 거칠게 항의할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와 노진준 목사님 덕분에 죄인이라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고, 지금은 "나는 죄인"이라는 말에 거부감은커녕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숙연해지고 내면에 어떤 목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다.




기독교 세계관에 관해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죄인이라는 개념이다. 바로 이 "죄인"에 대한 오해로 인해 어쩌면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너무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낙인이 찍힌 건 아닐까 할 정도이다.




기독교에서는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심지어 전도할 때에도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꺼내곤 한다.




법 없이도 살아온 선량한 사람에게 기독교 신자가 "당신은 죄인입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거부반응을 일으키기에 딱 좋을 것만 같다.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돈을 훔치지도 않았으며 사기를 치거나 물리적인 피해를 가한 적도 없는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말한다면 이건 그 사람이 살아온 삶에 대한 총체적인 모욕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성경책을 읽어 왔다. 그리고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곤 했었다.




그런 나에게는 성경은 하나의 주어진 환경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말에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죄라는 말 때문에 나도 죄인이라는 죄책감, 정체 모를 죄의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곤 했었다.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거나 학교 숙제를 하지 않았을 때, 야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볼 때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인 것만 같았다. 이러한 생각이 들게 된 데에는 구약 때문이기도 했다.




신약과 달리 구약 시대는 계명이라는 엄격한 행위 윤리가 인간의 삶을 지배했었다. 하지 말라는 계명들이 너무도 많았다.




십계명이 대표적인 예이다. 십계명 중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은, 적어도 내게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계명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하나님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상이라고 말해주곤 했었다.




성경책보다 더 보고 싶은 소설이나 드라마, 찬송가보다 더 듣고 싶어 했었던 대중가요 이것들 모두가 나에게는 우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음악을 듣고 소설책을 읽으면서 나는 죄의식이 동반되었었고, 그때마다 나는 좌절하고 말았다.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건 하나님보다 중요시하는 그 무엇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는 죄인의 굴레에서 벗아날 수가 없었던 현실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않고 천국에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은 목회자의 길을 걷는 일밖에 없었다.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고 가정을 꾸리는 일조차도 하나님보다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는 것도 우상을 섬기는 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에 도저히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한 사람으로서 이런 일은 우상이 아닐 거라고 애써 외면해 왔고, 죄인이라는 말 자체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성경책을 읽었던 나조차도 죄인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고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훌륭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단번에 깨달았는데 나의 이러한 일들은 성경에 대한 몰이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무지에 따른 것이었다. 특히 내가 오해했던 것은 바로 원죄에 대한 것이었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선악과라는 나무를 두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어버렸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죄라는 개념의 기원이다. 그런데 나의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선악과를 내가 따먹었나? 나는 그저 그런 사실도 모르고 태어난 죄밖에 없지 않냐고.




누군가는 나의 억울한 호소에도 이렇게 맞대응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과연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 같나요? 과연 당신은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을 자신이 있으신가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지금도 작은 유혹에 빠지기 쉬운 마당에 나라고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지적은 그만큼 탁월했고 옳았다.




그래서 나도 원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죄인이라는 점은 충분히 인정했다. 그런데 과연 그걸로 죄인이라는 의미가 끝이란 말인가라는 새로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서 그 종교를 증거 하는 경전이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어긴 죄인"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것이 맞냐는 것이었다. 나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이야,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아마 노진준 목사님의 말씀을 유튜브에서 우연히 듣지 못했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기독교의 세계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오만했던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 노진준 목사님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그분의 가르침은 이 삶을 바라보는 눈, 그 관점을 180도로 달라지게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에 의해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세계를 해석하는 일련의 생각들, 다시 말해 세계관이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그 행동의 중심축에 어떤 세계관이 놓여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치관이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사회를 경쟁사회로 인식하게 되며,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그가 가진 돈과 그의 능력으로 평가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의 내면에 깊이 숨겨진 세계관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얼마나 건강한 가치관을 품고 있는지에 따라 삶의 내용과 형식이 모두 달라지게 된다. 이 세계를 해석하는 나의 세계관이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한 그분의 가르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이러한 아름다움을 함께 누리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빚으신 뒤에 그 두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에덴동산 중심에 있는 선악과를 절대로 먹지 말라고 당부하셨었다. 그러나 인간은 뱀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뱀이 하와에게 다가가 물어본 첫마디가 아주 교묘했다. "하나님께선 정말 이 동산에 있는 건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하셨지?"




하와는 아니라고 답했다. "다 먹어도 된다고 하셨는데 오로지 이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하셨어."




사탄이 대답했다. "그건 네가 저 선악과를 먹으면 선과 악을 아는 일에 눈이 밝아져서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야."




사탄의 이 말을 간단히 말하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된다는 건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언약에서 자유로워지고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 된다는 뜻이었다.




사탄이 가장 원하는 것은 인간이 사탄을 섬기는 데에 있지 않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사탄이 가장 원하는 일이다.




결국 사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성취하고 말았다. 이것,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인간의 죄인 오만함이다.




아담과 하와는 매일 에덴동산을 돌아다니면서 선악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 나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이다. 그분의 보호아래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되었다"라는 언약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선악과는 금기사항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현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인간이 먹었기 때문에 화가 나셔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게 아니었다. 실생활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아버지가 집을 나서기 전에 달콤한 과자를 구워 놓으시더니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이 과자를 먹으면 안 된다"라고 하셨다고 치자. 그런데 아빠가 집에 돌아와서 보니 아이들이 과자를 모두 먹어치웠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화가 나서 아이들을 집 밖으로 영원히 추방시키겠냐는 말이다. 인간도 하물며 그렇게 할 텐데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분께서 그럴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쫓아내신 건 인간이 스스로 인생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오만함이 바로 죄였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그 뒤로 어땠는가? 행복해지기 위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영원한 행복이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의사가 되고, 건물주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돈을 많이 모으고, 세계적인 기업을 이끌고 있어도 인간은 영원히 행복하지 못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별짓을 다해도 그 끝에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죽음"뿐이다.




그 죽음 앞에서 인간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의 의미였다.




우리가 살인을 해서, 우리가 물건을 훔쳐서, 우리가 사람들을 미워해서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영원한 소망, 행복 그리고 만족이 없다는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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