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문학감상

by 이각형



문학 작품을 읽고 나서 감상문을 쓸 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바로 펜을 드는 편이 아니다. 아무래도 작품세계를 단숨에 파악한 듯 성급한 인상이 남을까 하는 염려에 조심성을 발휘하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필요한 것은 나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해준 작가의 심오한 세계에 대한 존중이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습관인 것 같다. 보통 길어야 일주일 정도 다른 책을 보면서 전에 읽었던 작품에 대한 여운을 음미하곤 한다.




여운의 끝을 길게 늘여서 마음에 남겨진 인상을 살펴보면 어느새 감상의 한 측면이 분명해질 때가 다가온다. 아마도 길고 긴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느라 앞부분에서 읽었던 중요한 장면이 흐릿한 기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꾸 나를 위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게 아니면 완독을 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지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 기다릴 때도 종종 있었다. 내 나름대로는 이러한 과정을 문학적 감수성을 숙성시키는 시간이라고 여기며 문학을 읽을 때마다 이 시간을 기다리고 기념하는 편이다.




이렇게 숙성시키는 시간을 보내야만 그 작품이 나에게서 완성되곤 했다. 이 시간이 생략되면 나에게 그 작품은 미완성작이자 미결된 숙제로 남았다.




보통은 감상과 영감이 무르익을 때까지 길어야 일주일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나서는 생각할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많이 필요했다.




지금도 실제로는 아직 감상이 무르익었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1 회독을 완독 하자마자 다시 1권을 펼쳐 들었을 정도이며 지금은 작품 중 가장 감동적인 대목을 읽으며 풍요로운 문학적 감수성을 누리고 있을 따름이다.




보통 이렇게 문학적 감수성이 벅차오를 만큼 내면을 채우고 있을 때 감상문을 쓰는 경우란 없었다. 벅차오른 감성이 어느 정도 진정된 다음에 펜을 드는 게 더 나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힘에 이끌린 나머지 내 의지가 아니라 그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손으로 옮기기만 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발휘될 일은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내게는 하나의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을 향한 독자들의 환호성이 왜 그렇게 잠잠했는지에 관하여 의문을 풀어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작품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방대한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입장에선 미완의 작품이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2권이 발표되었었을 것이다.




미완성작이라는 점이 독자로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적 통찰을 집대성한 이 작품은 말년에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마지막 힘을 짜내 자신의 문학을 완성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가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고전문학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말고는 없을 것이다.




한참 이 책에 빠져 있을 무렵 동료 직원이 자신은 최근에 고전 작품 읽기를 시작했다고 부끄럽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카라마조프를 읽어볼 것을 추천해 주었다.




그만큼 고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초보 독서가들에게도 접근성이 좋으면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평소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이 읽기 시작하더라도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흡사 만화책을 읽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는 고전문학이다. 역시 천재라면 역시 이렇게 쉬운 문체로 위대한 가르침을 남길 수 있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십여 년 동안 애서가를 자처하며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도스토옙스키를 추천받은 적은 딱 한 번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에 관해서 나의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았었다.




그러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2 회독하고 있을 무렵에 은퇴하신 직장 상사분과 저녁 자리를 갖게 된 적이 있었다. 그분도 워낙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지만 동석한 다른 직원들과 골고루 대화를 하기 위해 책 얘기는 따로 할 수 없었다.




마침 그분이 사는 곳이 같은 동네여서 집까지 같이 오게 되었었다. AI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가 요즘엔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기쁜 마음에 얼른 답변해 드렸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아주 의미 있는 한 가지 말씀을 남겨주셨었다.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본 적이 없지만, 누군가가 그러더라. 도스토옙스키를 읽지 않고 인생에 관해서 논하지 말라고."




물론 이 시점에 이 말을 꺼내는 것은 문자 그대로 도스토옙스키를 읽기 전에는 인생에 관해서 떠들지 말라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라는 대문호에 관해서 잘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제 겨우 그의 작품세계 중 두 번째 작품을 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생에 관해서 논하지 말라는 그 짧은 한마디에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속으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었다. 재미도 있고 위대한 교훈도 있긴 하지만 과연 그 정도까지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두 번째 읽고 있는 동안에 나는 그 짧은 한마디에 충분히 동의하게 되었다. 물론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사족을 붙이지만, 아직 나는 인생에 관해서 논할 자격이 주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왜 이 작품이 그토록 위대한 교훈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못했는지에 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게 바로 오늘 아침 차분한 가운데 자꾸 독서를 방해하는 하나의 질문이었다.




세계의 작가 100인에게 가장 부러운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때 가장 많이 꼽혔던 작품이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였고, 뒤이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뽑혔었다.




그런데 이토록 위대한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왜 작가들에게서 외면을 받게 된 것일까라는 질문이 오늘 나의 독서를 방해했던 것이다. 그 질문을 풀어내기 위한 과정이 바로 오늘 나에게 펜을 들게 한 어떤 의지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위대한 책들이 하는 역할이 하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대한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천재들의 위대한 사유는 세상을 바꾸곤 한다. 무엇을 바꾸는고 하니, 세상 사람들의 논점,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과 방향을 바꾸게 만든다.




예를 들어 두 번의 참혹한 전쟁을 끝나고 20세기 윤리학은 세 번째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지적인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어떤 통일된, 저마다의 주장을 통합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학자들의 논점이 향해야 하는 올바른 방향, 그 방향성을 제시하는 연구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다 존 롤스 교수가 "정의론"을 발표한 뒤로 현대윤리학의 토론은 모두 정의론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단지 존 롤스의 정의론이 참이고 진리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윤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난상토론을 잠재우고, 그동안 토론했던 관점에서 탈피하게 만들고 앞으로 미래의 인류가 준비해야 하는 윤리에 관하여 토론해야 하고 고찰해야 하는 위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지성이 세상을 바꿔나가는 방식이다.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 아니다 내가 맞고 네가 틀리다고 시끄럽게 난타전을 벌이고 있는 학계에 어떤 책 한 권이 던져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토록 난장판이었던 학계가 조용해지고 책을 던진 사람에게로 모든 시선이 쏠렸을 정도라니 얼마나 탁월했을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다.




문학에서도 이런 사건들이 종종 나타나곤 했었다. 가장 먼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가 어둠을 밝히는 횃불처럼 등장했었다.




그 후로 시간상으로 본다면 바로 이 작품이 그 사건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당대의 작가 100인에게서는 외면당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중반에 발표된 것으로 기독교에 심취한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이 아주 잘 드러나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만큼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큰 오해를 받고 있는 것도 거의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아름다운 미래상이 현실에서는 이뤄지지 않았다. 하나님 아래 모두가 한 형제이고 한 자매이기에 이러한 형제애를 바탕으로 모든 인류가 대통합을 꿈꾼다는 것이 과연 몽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냐고 토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개인이 고립되어 가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사후에 과학은 점차 더 발전하고 그에 따라 과학기술이 인류의 복지를 책임지게 된 지도 이미 100년이 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정신적 삶에 대한 필요보다는 물질적 삶에 대한 풍요를 꿈꾸기 마련이라서 과학을 신봉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한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는 21세기의 작가 100인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과연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완성한 도스토옙스키의 이 작품을 부러워할까 싶었다. 작가도 그러할진대 독자들 눈에는 이 작품이 어떻게 비칠 것인지, 생각만 해도 안타까움이 앞선다.




진보된 기술문명을 누리고 있는 우리의 20대 30대 젊은이들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 아마도 이런 생각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역시 오래된 작품은 구태의연한 냄새가 진동해. 누가 요새 종교와 신이 있다고 믿고 있어? 이런 책은 동화 같은 요소만 가득할 뿐이지 기술의 혁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야."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달에 우주선을 보내고, 지구 궤도를 공전하는 인공위성을 띄워 생활의 편리를 높이고, 핸드폰으로 전 세계 어느 누구에게나 즉시 연결될 수 있으며,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100세 시대를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는 인간에게 이 작품은 과연 시간낭비에 불과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서 따로 제시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나는 이 말 한마디로 답변을 대신하고 싶다.




우리 인간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과 소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우리가 만족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순간에 불과하며 그 순간적인 만족을 연장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된다.




그런 나약한 인간에게 과연 이 작품은 어떤 메시지를, 어떤 위대한 가르침을 남겨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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