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적 갈망으로 바라본 장치
나는 눈으로 보면서 해석하고 싶다. 눈을 보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은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존재적 갈망을 소진한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통해 사물을 보는 동시에 해석하고자 한다.
그래서 어떤 사물이 주어질 때마다 그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존재적 갈망을 소진하고 있는 사물의 의미를 분석하고 숨겨진 그 비밀을 풀어내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에게 시각을 담당하는 기관인 눈은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다.
오징어게임 시즌3에서는 얼핏 보기에 맥락 상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두 번 정도 나온다. 그 장면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라 작품의 연결성을 조금 떨어뜨리는, 매끄럽지 못한 장면이 나온다.
이 글은 그러한 장면을 보다 섬세하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혹시나 여기까지만 읽고 작품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비판하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오해할 수 있어서 미리 이 글의 의도를 밝히고자 한다.
실제로 두 장면에서 나는 '이걸 왜 갑자기 넣은 거지?'라고 의아함을 갖추지 못했었다. 아무래도 뭔가 어딘지 모르게 개연성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작품의 핍진성 면에서 점수를 떨어뜨리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두고두고 곱씹어보니 작가의 의도가 보였다. 작품의 스토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번의 비평에서는 어쩔 수 없이 스토리를 소개할 수밖에 없게 된 점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두 장면은 모두 숨바꼭질이라는 게임에서 나왔다.
첫 번째 장면은 남규가 마약이 들어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흘려버린 장면이었다. 그리고 민수가 목걸이를 우연히 줍게 된다.
사실 이 장면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뭔가를 흘려버린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 나중에 이어지는 어떤 장면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게 만드는 정도였다.
그리고 분명했던 것은 남규가 마약에 의존해 살인을 저질러 게임을 통과했던 만큼, 마약을 잃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게임을 무사히 치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남규에게서 멸시와 조롱을 당했던 민수가 그것을 줍게 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복선이 깔린 것이라고도 쉽게 예상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위한 장치였고 도구였는지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야 그 실마리가 풀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게임이었던 줄넘기에서 첫 번째 도전자를 골라내기 위한 장치였다.
다음 게임이 줄넘기라는 것이 소개되자마자 나는 과연 누가 첫 도전을 내밀 것인가에 관해 상당히 궁금했었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만담가다운 재능을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쇳덩어리로 된 줄을 한 사람이 겨우 건널 만큼 폭이 좁았던 10층 높이에 가까운 외나무다리 위에서 뛰어넘으려고 시도할 첫 도전자가 누가 될지, 시청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부드러운 연결을 원했었다. 이러한 것들을 위해 작가들은 미리 장치를 심어놓곤 한다.
마지막 남은 한 알의 마약을 몰래 숨기고 민수는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며 남규를 도발한다. 그리고 그 목걸이를 외나무다리 위로 던져버리면서 남규는 냉큼 다리 위로 올라서게 된다.
자신의 존재적 갈망, 다시 말해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환각제이자 용기를 주는 약물만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남규의 갈망이 위태로운 다리 위로 던져졌다. 자신만의 무기를 얻기 위해 없던 용기를 내서 다리 위로 몸을 던졌지만, 불행히도 목걸이를 열었지만 빈 통이었다.
남규는 목걸이가 비어 있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기진맥진해진 나머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쇠줄을 피하지 못하고 줄넘기 게임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숨바꼭질에서 이해되지 않았던 다른 장면은 장금자 씨가 자신의 아들인 용식이(양동근 분)를 죽이는 장면이었다. 이제 막 태어난 다른 여자의 갓난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아들을 흉기로 찔려 죽이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결코 미화될 수 없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인류를 위한 생명의 소중함이란 가치, 대의와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이라고 해도 현실성이 너무 떨어진다면서 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아들을 죽이고 돌아온 장금자 씨는 여전히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책감이라든지 무자비함을 보여주기는커녕 오히려 산모와 갓난아이를 손수 챙기면서 인류애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감동적인 장면인 동시에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모습이었다.
이 장면이 작품의 흐름상 너무 어색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동안 작품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준 탐욕에 빠진 인간들의 무자비함이 줄곧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장금자 씨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장금자 씨는 아들에게 자신이 대신 죽어도 된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모성애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던 만큼 그녀가 아들을 죽이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야 말았다.
과연 이 장면은 인류애라는 보편가치, 이것 하나만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작품 흐름에 역행하면서까지 그려낸 것일까?
물론 이 장면만의 가치를 드러내 본다면 자기희생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장금자 씨는 아들을 죽이는 대신에 자신을 희생시키는 선택도 가능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아들에게 어머니를 죽이라고 하는 패륜적인 일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선택은 더 어려워진다. 자신의 몸을 던져 아들에게 패륜적인 행위를 종용할 게 아니라 차라리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선택이 오히려 더 쉽다. 그게 양심적인 사람의 선택일 것이다.
나 하나 살자고 타인의 목숨을 앗아갈 바에는, 그런 세상에서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이 아들을 죽이고 자신까지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일이 더 미덕에 가까운 일이었다. 비록 아들을 죽여야 한다는 비극적 상황에 내몰린 것이 한스럽긴 해도 적어도 영혼이 신을 마주 볼 때 떳떳할 수 있다.
나는 그 장면만의 가치인 자기희생을 폄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치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작품의 흐름을 역행하는 사건을 작가가 첨가하면서까지 자기희생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다면 작가가 장면을 묘사하고 연출하는 시간을 그토록 짧게 할애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그 의도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금자 씨의 희생이 가져온 결과는 바로 성기훈 씨에 대한 동기부여였다. 성기훈 씨는 게임을 전복시키려고 했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친구까지 죽음에 이르자 망연자실 자신을 놓아버렸다.
그래서 숨바꼭질 게임에서는 오로지 작전 실패의 책임자를 응징하려는 목적으로만 참여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잔인한 게임에 참가하게 된 선량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게임장에 다시 뛰어들었던 그가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복수의 끝은 언제나 공허함이듯이 성기현 씨도 응징을 마치고 결국 공허의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의 눈은 빛을 잃어버렸다.
그런 성기훈 씨가 다시 회복하여 게임에 활동적으로 참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새 생명이었다.
지신과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생판 모르는 갓난아이를 살리기 위해 다시금 힘을 낼 수 있게 만들 무언가가 바로 장금자 씨의 자기희생이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무수한 밀알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장금자 씨의 희생은 타인에게 새로운 희망과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었다.
자, 이제 남은 두 편의 에피소드를 보면서 오징어게임의 마지막 이야기를 즐겁게 감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