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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pr 17. 2023

나는 늘 사유 속에서 삶의 무게를 느낀다.


나는 늘 사유 속에서 삶의 무게를 느낀다. 서투른 사람일수록 그의 행동이 늘 사유의 근거가 될 뿐이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괴테가 분명한 어조로 우리에게 밝혀준 것처럼 행동이 쉽고 생각이 어려운 법이다.

그 사람의 언어에 그 사람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말을 어두운 관념의 세계를 비추는 횃불처럼 들고 서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신경을 이용해 세상을 해석하고자 할 때 상대방의 말에 그치지만은 않으리라. 우주의 별을 가슴속에 품고 밤길을 걷는 사람은 본능에 이끌리는 사람이다.

몇 해 전에 본사에 들릴 일이 있었다. 로비에 들어섰을 때 나는 로비 한쪽에서 쏟아지고 있는 화려한 색채에 어지러움을 느낀 나머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로비에는 마치 미술관을 그대로 들여온 것처럼 작은 전시회가 열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의 작품은 유럽에서 몇 세기 전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실주의 회화였다.

21세기가 지난 지 이십여 년이 흘렀는데도 본사 로비에는 사실주의 미술이 갑작스럽게 쳐들어 왔다. 로비에 발길을 들여놓기 전까지 사실주의 예술작품과 마주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무방비 상태였던 나로서는 예술의 불모지였던 직장에 사실주의 작품의 전시회를 개최한 주최자를 찬미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무딘 감각과 시대에 뒤처진 예술적 감수성에 탄식해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예술은 사물의 모사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사실주의 미학에 관해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못난 나로서는 주최자의 서투른 눈썰미가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다만 사실주의가 그를 사로잡은 이유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마주치는 시름에 시달려온 사람이 불안에 지친 나머지 그리워하며 찾는 것이 바로 사물의 견고함이리라.

삶이라는 것은 결국 길을 잃어버렸다는 자각, 어찌 보면 가장 순수한 진리일지도 모를 이러한 자각이 없다는 건 바쁜 현대인들이 마주 보기 두려운 비극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게르만족의 기하학적 무늬와 고딕양식은 그러한 비극적 존재의 갈망을 그려낸 민족적 의식이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사실주의가 단지 사물을 모사하는 데에서 끝났다면 사실주의는 예술사적으로 회화의 기법을 발전시키기 위한 시도였다는 의미 말고는 남은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사실주의는 사실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물을 개념으로 소유하고 있다. 사물과 인간 사이의 매개가 개념이라면, 관념은 일반화되기 전까지 개인에게 이슬로 맺혀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사물을 볼 때 관념이라는 망루 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사물을 사유 안에서 직접적으로 소유하는 방법이란 없다.

화가가 그린 사실주의 그림은 화가의 관념에 맺힌 사물을 그린 것으로 이는 곧 사물에 관한 관념을 그린 것이다. 그에게 관념이란 이상적인 무엇이다. 결국 사실주의는 이상주의다.

이런 식으로 소규모 전시회를 이해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비록 정식으로 초대받은 적은 없지만, 주최자에게 진 빚을 청산한 것처럼.


신은 빛으로 세상을 만드셨다. 회화에서도 빛은 사물을 빚는 질료이다. 사물은 빛을 반사하며 표상을 세운다.

세상의 표상이 어떤 의미로든 다가오게 되어 있다. 사실주의를 그저 사실주의로 이해하지 않듯이 세상은 항상 내게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나는 늘 사유 속에서 삶의 무게를 느낀다. 삶의 요청이 가진 무게를. 사물이 발산하는 빛의 무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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