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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pr 17. 2023

커피중독자의 변명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모닝커피를 끊은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새로운 삶의 양식은 다짐했을 때와 다르게 상당한 모험이었다는 사실이 오늘 아침에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



월요일은 밀도가 다른 담수와 해수가 만나 섞이지 않는 모습과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직장인들 대다수는 월요일 아침에 이처럼 양립불가능한 세계가 중첩되는 기현상 안에서 운명의 무게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을 것이다.



운명이란 하고 싶어 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할 때 분명하고 엄격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주말 동안 누리던 자아에서 빠져나와 차가운 현실세계와 접하는 월요일 아침, 향긋한 커피 한잔이 주는 위로야말로 비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감각적이었다. 그랬던 것을 끊어내자고 결심한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모험이었던 것이다.



카페인이라는 중독물질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신이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의 주장은 일관적이지 않았다. 정신과 신체의 균형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카페인이라는 물질 하나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인간은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존재라는 명제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지만, 카페인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의미는 카페인의 공급을 통해서 시야가 밝아지고 마음이 안정을 되찾을 때 비로소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잃어버렸던 일상을 되찾은 것처럼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안정감이 혈관을 타고 마음속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모닝커피를 대신해 차를 마시기로 했던 나의 일주일간의 실험은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다는 건 아니었다. 커피와 다르게 차는 정신적 위로를 끝없이 깊은 향으로 대신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건강에 더 이롭기만 했다.



다만 카페인이 주는 기능적 효과만 부족할 따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능적 효과는 두뇌활동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저 심신의 안정, 다시 말해 이미 중독되어 버린 약물효과가 사라짐으로써 소실된 기능적 효과만을 말할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중독의 정도가 과하지 않아 두통 따위의 부작용은 나를 비껴갔는데, 카페인 금단증상으로써의 두통에 관해 내게는 오래전 추억이 하나 남아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하루는 아침 조회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서자마자 가슴팍에 끼고 들어온 무거운 책들을 탁자 위에 턱 소리가 날 정도로 내던지고 학생들을 향해 던진 선언이 고스란히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이렇게 선전포고를 했다.



"나는 커피중독된 상태인데 오늘 아침에 커피를 먹지 못해 지금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나의 예민해진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말아라."



당시 그녀의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한참 어린 40살이었는데, 하루는 출근길에 대학생이 자신을 처녀인 줄 오해하고 차 한잔 하자면서 인사를 건넸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한 광휘를 내뿜고 있었다.



길거리 헌팅을 당한 기분 좋은 상태로 강단에 서서 만면에 웃음을 가득 채우고 자랑을 일삼았던 그녀는 실제로 굉장한 절세미녀였다. 당시 떠오르던 하이틴 스타 김희선 씨가 그녀를 쏙 빼닮았을 정도였고, 그런 그녀는 내가 두 눈으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완벽한 미모를 가지고 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빨간색 체크무늬의 긴치마를 입고 빨간색 플랫슈즈를 신은 채 빨간색 뿔테 안경에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나타났을 땐 전교생이 숨이 멎을 정도였다. 그녀가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학교가 쥐 죽은 듯 말소리가 멈춰버렸었다.


카페인 금단증상으로 괴로워하던 그녀를 보면서 중학생이었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 절대로 커피를 먹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나도 필부에 지나지 않아 커피를 달고 산다.



일주일 동안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서 어딘가 정신의 한 구석에 깊게 박혀 있었던 쐐기, 정신줄을 붙잡고 있었던 그 쐐기가 빠져버린 듯했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심신의 안정을 되찾자마자 나는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수학의 미지수와 단 한 글자만 달랐던 그녀의 이름.



지금쯤 고희를 앞두고 있어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깊게 파여 있을 그녀의 소식이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남편을 따라 이국땅으로 건너갔던 그녀의 중년 이후의 삶은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햇살이 찬란한 오후의 해변 아스라이 반짝이는 모래사장처럼 광채로 눈부신 그림이었을까? 아니면 우중충한 겨울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 중에 택시를 붙잡고 있는 차가운 도시의 지적인 여성의 모습이었을까?



만약 고희를 앞두고 있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당신이 실망했던 그때 그 학생은 이렇게 중년의 한 남자가 되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러나 그때 그녀가 가르쳐준 독서의 가치를 느지막한 나이에 이르러 유감없이 누리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면, 노년에 이른 그녀의 지친 삶에 한 줄기 햇살과 같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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