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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pr 18. 2023

쓰디쓴 좌절감

"나는 늘 사유 속에서 삶의 무게를 느깐다"에 이어...


오전에 산적하게 쌓여 있던 바쁜 업무를 부지런히 마치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단안이 있었다. 그러한 생각을 붙잡아 이십여 분이 걸리지 않은 시간 동안 글로 옮긴 것이 바로 사유 속에서 삶의 무게를 느낀다는 글이었다.

  

리쾨르가 내린 작가의 정의, 모욕받은 주체를 극복하기 위해 기억이 이끄는 손 끝의 움직임을 따라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이 바로 작가라고 했듯이 오늘 아침 나는 모욕받은 나를 극복하기 위해 두 손가락을 움직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철학적 사유를 풀어낸 글처럼 보이는 그 몇 문장들이 잘난 체 또는 알은체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철학사에 한 획을 그은 철학자도 아닌, 그러나 내게는 거인과 같은 그의 그림자 밖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선 스스로 좌절감에 빠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겨우 이 정도밖에 글을 쓰지 못하는 건가? 겨우 내가 공들여 쓴 문장들이 이렇게 공소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단 말인가? 그동안 나는 과연 무엇을 해온 것인가?'


이런 씁쓸함은 보통 밤늦게까지 이어지곤 한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모욕받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써야만 한다는, 쓰지 않을 수 없는 벅찬 가슴을 안고 다시 펜을 잡고 이렇게 책상머리에 앉게 된다.


펜 끝을 종이 위에 툭툭 몇 번 찍어 보았지만 머릿속은 하얗기만 했다. 그래서 결국 푸념이나 늘어놓자는 식으로 잠시 긴장의 끈을 풀기로 했다.


오르테가의 철학서를 다시 펼쳐 몇몇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역시나 그의 철학적 사유는 친절한 철학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뛰어넘기는커녕 그의 그림자 안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이러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없다. 실존적 고독은 사소한 일에서도, 가벼운 일에서도 찾아오는 법인가 보다.


홀로 남겨진 기분에 빠져든다.


그러나 오르테가의 철학서를 훌훌 넘기다가 갑자기 한 페이지가 눈에 띄었다.


"만일 우리의 사유가 데카르트의 사유를 재사유하지 않는다면,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재사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유는 원시인의 사유가 되어버릴 것이다. 즉 우리는 과거에 이루어진 사유의 계승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며 처음부터 다시 사유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 무엇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 무엇을 계승하고 또한 추가하는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


언젠간 그리고 무언가, 단서가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좌절도 필요한 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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