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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pr 18. 2023

차이코프스키가 필요한 날이었다.


지난한 하루였다. 복잡다단한 일들이 줄지어 이어졌다는 점은 밥을 먹고 책을 읽는 것처럼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오늘 하루를 마치며 퇴근길 위에서 삶의 문제는 밀도에 관한 것이라고 어떤 물리학자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2년 730일의 군복무기간을 20세부터 70세까지 50년 동안 나눠 짊어질 수 있었다면 국방의 의무가 청년들의 인생을 옭아맨다는 볼멘소리는 자취를 감췄으리라.



자본가와 다르게 서민은 며칠 동안 일을 쉬게 되면 생계가 막막해진다. 그런 서민의 지위를 가진 이상 직장에서의 업무가 내적 성장을 위한 일과 일치하게 된다면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고 부러움을 사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런 종류의 일을 부러워한다는 점은 나의 업무가 내면의 성장과는 겹치는 점이 전무하다시피 하며, 대개의 경우 외부인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통통한 사람이 자신의 아바타를 고를 때 자신의 모습과 다른 이미지로 선택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업무의 성격에 대한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하기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오늘은 정말 차이코프스키가 필요한 날이었다.



보통 퇴근길에서는 가사가 잘 들리지 않아 독서에 방해가 되지 않는 팝을 듣곤 했는데 오늘은 팝이 위로나 위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내적 에너지를 분산시키기만 했다.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렸던 만큼 나의 내면을 부둥켜안고 답답한 가슴을 달래줄 수 있는 어떤 하나의 큰 방점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클래식 음악이 가진 비밀스러운 힘에 기대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핸드폰에 저장된 클래식 음악 중에서 무엇을 들을까 고민하다가 차이코프스키의 이름을 보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을 꾹 눌렀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교향곡 5번이었지만, 이 곡은 퇴근길과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물론 이 곡도 꽉 막힌 가슴의 애환을 풀어주기엔 적당히 좋은 편이지만 아무래도 한밤중에 듣는 것이 훨씬 잘 어울렸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것이 차이코프스키의 첫 곡으로 백조의 호수 중에서 열 번째 곡인 Szene을 선택했다. 이 곡은 워낙 유명해서 설명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명곡이다.



오보에의 가녀린 연주가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곧이어 관악기의 웅장한 울림 뒤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가녀린 음색으로 속삭이는 플루트와 바이올린 연주의 애절한 선율은 호수를 박차고 날아가려는 백조의 날갯짓이 연출하는 섬세한 떨림을 그대로 표현한 것만 같다. 이때의 나는 음악의 숙연한 분위기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회사 업무로 경직되어 있던 가슴을 이렇게 애절하고 낭만적인 멜로디로 여리게 만들어 놓은 뒤에 두 번째 곡으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이어 들었다.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기사"라는 책의 작가인 홍세화 씨가 한국에 놓고 와 생이별을 하게 된 가족을 그리워하며 가슴속에 쌓인 여한과 답답함을 깨부수기 위해 매일같이 들었다던 바로 그 협주곡이었다. 이 곡은 비극적 운명을 비웃는 것 같은 장쾌함이 특징이다.



시원시원한 바이올린 선율이 가슴을 찌르고 난 뒤 통쾌해진 마음이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게 만드는 용기를 샘솟게 한다. 하늘의 저주를 향해 까짓것 해볼 테면 어디 끝까지 해봐라는 식의 든든한 배짱을 부리게 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홍세화 씨의 고백대로 화가 난 가슴을 달래기에 제격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삼켰던 울분을 날려버렸다. 이윽고 집에 들어가 혼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비통함이 감돌았다. 다른 곡이 필요했다.



비통함으로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 비창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테지만, 비창은 내게 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내가 감전된 비통함은 연인의 부재였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선사하는 비통함에 시달릴 때마다 나는 언제나 이 곡을 듣곤 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이렇게 보면 러시아인들은 삶의 회한이 참 많은 민족임에 틀림없다. 물론 지금은 다르긴 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을 듣고 있으면 언제나 나는 떠오르는 그 장면에 마비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떠나야만 하는 군복을 입고 있는 남자와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 있는 담배연기가 가득한 술집에 앉아 있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기차 시간이 다가오면서 서로 초조해진 나머지 침묵한 채 남자는 보드카를 여자는 홍차를 마시며 마음으로 서로를 향해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쩔 줄 몰라하며 서로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술집에서는 담배의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길거리에 쌓인 하얀 눈과 어우러지더니 갑자기 흑과 백에 둘러싸인 채 액자의 걸린 사진의 한 장면으로 돌연 도망쳐버린다.



정적 속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처럼 또렷한 피아노의 선율과 다르게 플루트와 바이올린은 마치 잔잔한 마음의 파도를 그려내는 것처럼 고음도 아니고 저음도 아닌, 어쩔 줄 몰라하는 부드러운 곡선의 선율을 자장가처럼 들려주는 사이 나의 시선은 어느덧 두 사람이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곤 했다.  


여기까지 머릿속에서 상상을 이어가다 보면 내가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러시아인이 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어디선가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나타나선 우리에게 가슴 아픈 남녀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들려줄 것만 같았다.


이렇게 나의 오늘 퇴근길은 러시아의 음악가들이 위로의 선율을 들려주었다.



차이코프스키가 필요한 날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필요한 날이었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필요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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