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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pr 24. 2023

프루스트가 필요한 날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이 다시 내 손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마치 N극과 S극의 운명처럼 프루스트에게 저절로 이끌려갔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이 작품을 다시 읽고 싶어 하지 않아 했었다. 이런 심정을 고백하면서 이 작품에 대한 글을 쓴다는 건 굉장히 모순적인 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었다. 열세 권을 한꺼번에 구입해 놓고선 가보처럼 책장에 모셔두기만 했었다. 어쩌다 눈에 들어오면 한눈으로 째려보면서 '언젠간 읽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바빴던 그런 작품이었다.


As of today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내 삶의 8할은 오르테가와 프루스트 그리고 소세키가 키워준 셈이다. 그런데도 프루스트를 멀리했다니 참 이해가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하찮은 이유는 책 표지가 너무 예쁘다는 점이었다. 예쁜데 대체 무엇이 문제라는 걸까?


이 작품을 감싸고 있는 표지는 얇은 종이 위에 꽃잎을 그려놓은 것인데, 양장본 위에 한 겹 덧씌운 것이었다. 7년 전에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읽었던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예쁜 종이 표지가 며칠을 버티지 못했었다. 꽃잎을 수놓은 표지가 찢긴 걸 보는 내내 마음이 꽤 쓰였었다.


프루스트의 작품이 이렇게 허약하고 가녀린,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보호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낱장의 종이로 감싸진 채로 출간한 출판사가 못내 아쉬웠다. 화려했던 삽화가 너덜너덜한 종이 쪼가리로 전락하는 일을 몇 차례 경험한 뒤로 커버가 있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 무엇보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덧댄 커버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이었다.


어차피 보관해 봤자 먼지만 타고, 먼지가 내려앉은 뒤로는 입김을 불어 훌훌 털어보아도 어쩐지 어딘가 바래진 느낌이 들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얇은 종이로 감싼 표지는 너무도 가냘프고 연약했다. 두 번째 책을 읽기 전 양장본을 감싸고 있던 표지를 보호하고자 미리 벗겨내 책장에 꽂아두기도 했다. 아끼고자 했던 처음의 마음과 다르게 먼지가 쌓이고 햇빛에 바래지는 표지의 책등을 보면서 아끼고자 했던 마음이 현실로 이어지는 일이 흔치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을 가능하면 당분간 멀리했던 이유로는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예술적 감수성이 너무 자극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표지만 아름다운 삽화로 꾸며진 것만이 아니라 내용 그 자체가 너무도 아름다웠던 것이었다.


그래서 예술의 문외한인 나조차도 그의 현란한 문장에 이끌려 몽환적인 이미지를 꿈꾸며 나만의 그림을 그려내고자 하는 열병에 사로잡히곤 했다. 프루스트와의 열애에 들뜬 나머지 이 작품을 읽는 동안 현실과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일이 빈번했다. 두 눈을 뜨고 횡단보도를 건너는데도 몽유병 환자처럼 19세기의 파리지앵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등 시선 그 자체가 달라지곤 했었던 것이었다.


파리에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조차도 파리지앵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러한 놀라운 작품이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으면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간결하게 묘사된 라만차의 길거리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세르반테스의 재능을 프루스트가 꼭 빼닮았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말한 대로, 프루스트 이후로 우리는 우리의 재능이 가진 한계선이 어디쯤에 그어져 있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만큼 프루스트의 작품이 가진 내밀한 예술적 감수성은 5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틈새와 작은 균열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전염병 같은 그러한 예술적 내밀함이라는 문학적 열병에 감염되기만 하면 그저 글을 읽는 데에만 스스로 만족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마치 프로야구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바깥에 나가 공을 던지고 글러브를 끼고 필드를 달리고 싶은 어린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프루스트 이후 나쓰메 소세키 선생님을 알게 되었을 때엔 또 다른 세계를 접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프루스트와는 다르게 간결하지만 동시에 섬세한 터치 같은 묘사로 회화작품을 그려내는 소세키 선생님의 작품을 마주 볼 때마다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지경이라는 걸 깨달았다. 글로 그림을 그려내는 소세키 선생의 작가적 재능을 과연 누가 따라갈 수 있을까?


언젠가 밝혔듯이 죽기 전에 "한국의 나쓰메 소세키"라는 별명을 얻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미 이루지 못할 목표를 설정했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프루스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조금만 노력하면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적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그래서 더더욱 프루스트의 글을 멀리해 왔다. 그의 천재성에 탄복하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마치 그의 글이 나의 글인 것처럼 여기는 오만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 이 작품을 읽기 싫어했던 이유로는 바로 스노비즘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3권 중 1, 2권은 스노비즘이라는 차별을 경험한 어린 마르셀의 이야기가 주된 플롯이었다. (사실 이 책은 줄거리가 없는 소설이다. 스토리가 없다니 소설로서는 굉장히 특이한 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스노비즘이 무엇이라고 고작 그러한 사회적 병폐 때문에 멀리했냐면, 자본주의라는 거인에게 혈액을 공급하는 나의 직장 때문이다. 스노비즘이라는 독사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거인의 배후에서 똬리를 트고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스노비즘의 독성을 퍼뜨리려고 웅크린 채 도사리고 있다. 바실리스크가 음침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축축하고 어두운 던전을 기어 다니면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을 노리고 있다.


이 작품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매분 매초마다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스노비즘의 사례를 들먹이며 지적할 수 있을 만큼 스노비즘의 문화가 장악한 직장이라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더욱 스노비즘에 대한 경계심이라든가 경각심이 첨예해진 나머지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십상이었다.


될 수 있는 한 멀리하려고 했던 이 책을 꺼내든 데에는 오늘의 하루가 내게 부과한 무게가 상당하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물론 감당할 수 있는, 아니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한 정도이다.


하지만 쓰지 않고선 배길 수 없었듯이 읽지 않을 수 없어서 꺼내 들었다.


몇 년 전엔가 민음사에 전화를 걸어 김희영 교수님께서 왜 7~13권의 번역을 지연시키고 있냐며 제발 완간이 하루라도 빨리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민원처럼 들릴지도 모를 나의 간청은 그 이후로도 6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6년 동안 수많은 사건들이 내 머리 위로, 내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완간을 기다린 끝에 총 13권을 다시 새 책으로 구입해 놓고선 소장용으로 책장의 한 칸을 3년간 차지하고 있었던 이 작품의 첫 페이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또다시 한동안 프루스트 앓이가 이어질 것 같다.


다시 또 문학의 세계로 항해를 시작한 아르곤 호의 선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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