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출근길, 하프 코스를 달린 뒤라 발바닥이 조금 욱신거렸습니다. 그 외에는 특별히 체력이 달린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어서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습니다.
습관처럼 책을 보며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회사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브런치 글을 보다가 "나는 글을 왜 쓰는가?"라는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야구 좋아하는 사람이 스포츠 기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책 좋아하는 사람이 독서론에 관한 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왜 글을 쓰는가?"에 관한 글을 무심코 지나칠 수 없을 겁니다.
눈으로 주르륵 훑어보다가 몇 군데에서 눈에 띄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 작가가 그동안 어떤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었는지 알 수 있기도 했습니다.
그분의 글을 보면서 한편으로 그럼 나는 왜 글을 쓰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구독자 수도 얼마 되지 않은 이곳에서 생각날 때마다 글을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지만 생각만큼 어떤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더 아리송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뭔가를 꾸준히 하고 있지만 이유가 분명치 않으니까 말이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게 되는 법이지만 글과 관련해서는 딱히 그러한 갈망의 원인이 특정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 글을 점점 읽을수록 글을 대하는 작가의 장엄한 정신이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감정, 글을 대하는 작가로서의 태도를 읽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여전히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이 남겨졌습니다. 하도 이 질문에 천착한 바람에 제 몸이 하나의 질문으로 형상화되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실마리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눈앞에 놓인 당면과제부터 넘어서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방법론으로 저는 위대한 작가들이 왜 글을 썼을까에 대해서 고민해 보기로 했습니다. 과연 그분들은 왜 그렇게 길고 긴 작품들을 손수 남겼던 것일까요? 그게 가능했던 이유를 찾고자 한 것입니다.
평소 책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굉장히 낯익을 것입니다. 1984와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역국 작가 에릭 블레어가 그와 같은 제목으로 아주 멋진 글을 하나 남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에릭 블레어는 글을 쓰는 이유를 네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네 가지 이유 중에서 자신은 정치적 글쓰기를 위해 펜을 들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치적 글쓰기야말로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글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에릭 블레어의 정치적 글은 좌파와 우파를 초월한 글이었기 때문에 (약간 과장하자면) 현재까지도 하나의 고전으로까지 여겨질 만한 글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신문기사에 나오는 좌파, 우파의 논객들이 말하는 저급한 수준을 넘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경할 만한 하나의 이상적 세계를 그리고 있는 정치적 글쓰기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에릭 블레어의 작품에 비해 현대 정치면 기사들의 수준은 굉장히 편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저의 시선은 도스토옙스키나 헤르만 헤세, 마르셀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토록 방대한 작품을 남기게 된 것인지, 그들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브런치 작가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글을 아주 잘 쓰기 위해서 글을 쓰고 싶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의 그런 포부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구독자 수보다 더 관심이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의 글쓰기에 관한 것일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브런치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글쓰기 자체가 목표가 된다면 수단이 목적으로 변해버린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C.S. 루이스에 따르면 글을 잘 쓰는 방법은 실질적으로 없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글을 많이 쓴다고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건 그다지 연관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글이라는 건 글재주라는 말이 있듯이 재능이 필요한 영역이기도 하거니와 단순히 재능만 있다고 해서 재능이 만개하리라는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방향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만일 천 편의 글을 쓰고 난 뒤 스스로 '아 이제 난 글 좀 쓴다'라고 자족해 버리면 실제로 좋은 글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붓을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대문호들은 자신이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장편의 글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대문호가 우리에게 남긴 예술적 관점은 그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잘 써서 우리가 감동한 것이 아니라 대문호들은 인간적인 문제를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자포자기햐듯이 그들의 외침에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연습량이 충분하더라도 아마추어 축구팀이 월드컵 우승 국가를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의 생각이나 목표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서로의 다른 차이점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의 분명한 목표가 꾸준한 글쓰기를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습니다.
저처럼 가끔씩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성실한 작품활동이야말로 내가 갖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스레 왜 글을 쓰고 있는지에 관해 자문해 보았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글을 쓰는 게 재미있습니다. 그저 재미가 있기 때문에 아무런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던 것입니다.
게임 중독은 게임이 재미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집중력이 약한 인간은 재미가 없으면 몰입이 불가능하고, 몰입이 없다면 성취도 불가능합니다.
3천 페이지가 넘는 작품을 남기는 일이 쉽지 않을 겁니다. 그 고난의 시간을 버티기 위해선 신념도 필요하겠지만, 신념이 원동력이 되어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재미라는 용어는 가볍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가 없다면 꾸준함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글 쓰는 재미를 거론한 것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는 일에 평생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까요? 시시포스도 고작 신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은 인고를 거친 안락이 가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안락을 향한 여정은 재미라는 돛을 단 배를 타고 순항할 수 있는 법입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을 이기는 사람은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간혹 끼니도 굶어가며 그 일을 즐길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글을 잘 쓰는 사람으로 변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수단이 목적이 되는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글은 작가의 시선을 담은 그릇에 불과하니까요.
당신이 인류를 위해 발견한 우주적 진리를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