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 유형을 분석하는 여러 가지 항목들 중에서 지적 호기심에 대한 질문지가 포함될 때가 많습니다. 무심코 답변했지만 결과지에서는 지적 호기심이 있다는 말을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결과지를 받아본 적이 있기는 합니다. 그 표현을 받게 되면 어쩐지 기분이 좋기는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 자신에게 지적 호기심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기분은 좋아도 실제 저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결과인 것 같다며 크게 중요한 특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대학을 나왔고 취업하기 위해 전문자격증에 도전했다는 사실 정도로 지적 호기심을 판단하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먹고살 궁리를 하다가 나온 선택과 그 결과물에 불과했기 때문에 저로서는 그런 과정을 거친 것이 지적 호기심이 있다는 점과 연결된다고 보기엔 어려웠습니다.
삼시 세끼 밥을 먹는다고 해서 먹는 걸 좋아한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불현듯 지적 호기심이 있는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어떤 근거를 발견했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시끄러운 소리들을 글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으니까요.
무엇이든지 동일하게 갖고 있는 것들은 종 전체를 대표하는 특성일지는 몰라도 종 안에서 개체를 구별하는 개성으로 여겨지진 않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글을 쓸 줄 알고 그중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소리가 아니라 글자로 표현하는 걸 선호한다면 그것은 그저 선호나 취향의 차이일 뿐이라고 여기기 쉬운 법입니다.
하지만 모든 집에 TV가 한 대씩 있다면 TV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특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TV가 없는 것이 특별한 점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오늘 아침에 깨닫게 된 동기가 저희 집에 TV가 없어서는 아닙니다.
저는 요즘 C.S.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 물론 문학도 동시에 읽고 있고 있습니다만, 뭔가를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나 한 편의 훌륭한 강의를 듣고 있다는 기분에 빠지게 하는 글입니다.
출퇴근 길에서는 보통 지식이나 지혜를 전수해 주는 책들을 읽는 편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자애로운 글을 읽으면서 지적인 만족감에 빠진 채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지하철에서 빠져나오다가 문득 저는 이런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아, 왜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사람들은 읽지 않는 걸까?'
물론 많은 사람들은 C.S. 루이스가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라고 얘기해 주면 그제야 "아, 그 사람!"이라고 수긍할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C.S. 루이스는 아주 어려운 주제를 아주 쉽게 풀어내는 글로 유명한 분입니다. 문체 또한 정말 부드럽고 자애로운 나머지 마치 할머니의 품에 안겨서 옛날 얘기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될 정도로 편안한 글을 쓰신 분입니다.
더구나 아주 예리하고 철학적이며 논리적인 분석을 들려주기 때문에 배우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아, 그동안 내가 고민했던 걸 이렇게 설명할 수 있구나.' 라거나 '아, 이게 바로 이거였어?'라며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아침도 그의 책 "네 가지 사랑"에서 우정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지하철에서 나오자마자 너무 흐뭇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겐 큰 행운이자 행복이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질 만큼 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저는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성격이라서 C.S. 루이스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치유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더 만족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아주 흡족한 기분으로 지하에서 빠져나오는데 불현듯 저희 부서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부장님을 포함해 12명의 부서원 중에서 전문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보자면 꽤나 박식한 전문가 그룹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독 한 사람만 책을 놓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고개가 갸우뚱했습니다. 왜 우리 부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 걸까라는 의문이 그들과 저를 구분 짓는 어떤 차이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은 책이 없이도 밝고 즐거운 하루하루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책 없이도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불만이나 결핍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그분들의 일상에는 책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책이란 지적 저작물이라는 점을 그들의 행복한 삶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그분들에게는 지적인 희열이라든지 만족감이 아무런 매력을 호소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적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핍은 필요를 만들어내고, 필요는 행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결국 그분들의 삶에는 지적인 목마름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상태만으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아니 오히려 책을 보면 더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그래서 책이 그분들에게 길바닥에 떨어진 지폐 한 장만도 못한 사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길에서 지폐 한 장을 줍는 건 행운이겠지만, 책에서 얻어 낼 것이 없으니까요. 그러면 과연 무슨 일 때문에 저는 결핍을 느끼고 책을 들고 다니는 걸까요?
좋은 글을 읽고 얻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사실 저는 모르는 게 너무도 많습니다. 모르는 걸 모른 채 살아도 되는 게 아니냐고 하실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생계를 위한 지식은 별로 욕심이 없지만 삶을 위한 지식(지혜를 포함)은 모르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 세계의 실재는 과연 무엇인지, 존재란 무엇이고 삶은 또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서 모르고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저의 무지를 알게 해주는 여러 분야의 글을 통해 고민 안에 머물러 있던 저를 도와주게 되고 맙니다.
단지 좋은 글을 읽고 지적인 만족감을 얻었다는 기쁨에서가 아니라, 모르는 게 너무 많지만 모르고 싶지 않다는 어떤 무엇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 이 탐구활동을 멈추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적 호기심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자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지금에서야 겨우 하게 된 걸 보면 역시 저는 참 모르는 게 많습니다. 이 세계, 삶뿐만 아니라 제 자신에 관해서도 모르는 게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알기 위해서 거울이 필요합니다. 책이라는 거울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 채로 살아가는 게 참 좋습니다. 끊임없이 저의 벽을 허물어주고 있는 수많은 거인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