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by 이각형


내일을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존재들은 두려움에 휩싸인 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고 달성하려고 했던 모든 이유의 이면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나 승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이나 살림살이를 위해 저축하는 주부들이나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이렇듯 두려움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큰 힘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라는 게 항상 좋은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옴짝달싹도 못해 사고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결국 두려움이란 감정 자체는 해악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삶의 질이라든가 목표의 달성 여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제 처음 달려 본 42.195km가 바로 저에겐 그런 경험의 표본이었습니다. 이런 장거리를 처음 달리다 보니 체력의 한계가 언제 드러날지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또 설렁설렁 뛰어도 4시간 30분이면 도착하겠다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이 자신감은 대회에 출전하기 전에 개인연습을 하면서 쌓아 온 마일리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근거가 아예 없지만은 않았습니다.


32km까지는 뛰어봤다, 그리고 나머지 10km만 70분 안에 뛰면 4시간 반이면 충분하다는 제 나름대로의 전략이 서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대회에 대한 두려움에 주도적으로 건강하게 반응한 것이 바로 대회 전 개인훈련이었습니다.


다만 실제로 그 거기를 다 뛰어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32km 이후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상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2km까지 힘을 비축해 가면서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결승점을 통과할 때 마라톤이 생각보다 심심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 달릴 수 있을 것처럼 몸 상태가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록지를 보니 다소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조금만 더 힘을 써서 달릴걸, 그런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심각한 후회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음 대회 때 조금 더 힘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서 써보자라는 식으로 다음을 기약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내년에도 같은 코스로 뛰게 된다면 훨씬 더 전략적으로 힘을 배분해서 기록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전체를 달려봤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덕분일 것입니다. 제가 달려보지 못한 장거리, 이 장거리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이 어제 레이스를 치르는 동안 등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었으니까요.


결국 저는 후반부에 대한 두려움에 너무 민감하게 신경 쓰느라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제가 가진 모든 체력을 다 쏟아붓는 경기력을 보여주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시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목표가 너무 낮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스타트 라인에서 같이 서 있던 팀장님께서는 저를 북돋아주시려고 이런 말씀을 해주셨었습니다.


"X차장, 처음이라고 너무 목표를 낮게 잡지는 마세요. 미국의 어떤 수영선수에게 혼자서 최대한의 힘으로 바닷가 수영을 하라고 시켰더니 6km가 최대치였어요. 그런데 다음 날 다시 바다 수영을 시작하면서 실험자가 그녀에게 이번엔 저 부둣가까지 수영하셔야 합니다라고 목표를 주었더니 총 10km를 수영했다고 해요. 그러니 X차장, 처음이라고 너무 목표를 낮게 잡지는 마세요."


출발선에 서 있었을 땐 이런 얘기가 잘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레이스 구성에 대한 계획을 검토하느라 듣는 둥 마는 둥 했었으니까요.


그 팀장님께서는 어제로서 총 114번째 풀코스를 완주하신 만큼 마라톤 경험이 굉장히 다양한 데다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께서 격려의 말씀을 해주셔서 기분이 좋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눈앞에 펼쳐진 42.195km라는 새로운 세계가 더 걱정이고 두려웠었습니다.


결국 그 팀장님과 대략 3-4분 차이로 결승선에 도착했습니다. 팀장님께서는 먼저 도착하신 후 결승선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셨지만, 결국 거의 비슷하게 들어와서 기다림 없이 서로 사진을 찍어 오늘을 기념하고 내일을 약속하고 헤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온 과거를 이런 관점에서 들여다봤을 때 한 가지 후회로 남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공인회계사 시험에 도전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1년에 합격자가 500명도 안 되었기 때문에 잘못하다간 고시생이라는 늪에 빠질지도 몰라 일부러 도전하지 않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에서 회계사들이 둘러싼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참 이상한 현상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고시생이라는 불안정한 신분이 두려웠었습니다. 4~5년 동안 실패를 맛보며 포기하지도 성공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미래가 두려워서 도전할 생각도 아예 안 했던 겁니다.


그런데 제 주변에 있는 회계사들을 보면 그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저희 팀의 팀장님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분명해집니다. 팀 주간회의를 할 때 자세히 보면 팀장님은 팀원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한 번에 이해하는 적을 본 적이 드물었습니다.


나이가 50이 넘었으니 집중력이 떨어질 법도 하겠지만, 오랫동안 주의 깊게 살펴보니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력의 문제였다는 걸 얼마 전에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팀장님은 합격자 수가 200명이었을 때 합격한 것이었으니 한국공인회계사가 그렇게 어려운 시험은 아니라는 걸 어림짐작할 순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당시 한국공인회계사 시험에 도전하지 않고 더 취업이 잘 될 거라고 저 혼자 예상하고 기대했던 자격증에 도전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취업이 가능했고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직장인의 삶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20대 중반 삶에 어떤 혼탁한 혼류가 몰아닥쳤을 때 의대를 가기 위해 다시 수능을 공부할지 아니면 취업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도 약간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때 당시에도 너무 불투명했던 미래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안정적인 일상을 누리기 위해 내린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다고 해도 그때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하다간 지금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 절반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마라톤을 뛰고 들었던 생각은 결국 돌아보면 두려움이 저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있구나였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뭔가에 도전하는 일에 두려움보다는 신선한 자극이나 생동감 넘치는 활력을 기대하고 시작하는 것이 제 삶을 더 윤택하고 즐겁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너무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보수적이었던 제 자신을 알껍질을 깨게 해 준 JTBC마라톤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씻은 듯이 사라지게 만들어 준, 자신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 준 어제가 저에게는 이처럼 다채로운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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