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의 쾌락은 실체가 없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누가 저에게 같이 마라톤을 해 보자라고 했을 때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하곤 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체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바로 풀코스에 도전할 정도로 체력이 강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풀코스에 도전할 정도로 체력을 키우기엔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웬만한 사람들의 인식에는 마라톤은 인간 체력의 한계점에 도전하는 종목이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그렇기도 했습니다.
매주 산행을 다니고 있는데 굳이 마라톤까지 도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겁니다. 사서 고생하는 건 등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더구나 등산은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운동이어서 그 매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생각할 시간을 갖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저는 산에 오르기 전에 마음속에 질문을 하나 들고 올라갔다가 그에 대한 답변을 가슴속에 품고 내려오곤 했었습니다. 등산은 제게 사유의 시간이자 사유의 재미에 빠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마라톤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두어 달 뛰어 본 결과 종독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등산보다는 달리기가 훨씬 중독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달리기의 쾌락은 실체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자신의 두 다리로 뛰어서 얻게 된 쾌락인데 무슨 실체가 없냐, 경험만 한 실체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땐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달리기의 쾌락은 실체가 없다는 데에 더 가깝습니다.
쾌락은 보통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데 그 경험 안에서 쾌락을 느끼게 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안 미각의 쾌락을 느끼게 되고, 감성적인 음악을 듣는 동안 청각의 쾌락을, 훌륭한 회화 작품을 감상하면서 시각의 쾌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험 그 자체가 기쁨이고 희열이자 쾌락의 원천이 됩니다. 그런데 달리기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은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5km를 전력질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생각부터 드나요?
숨이 덜컥 막히지는 않을까? 전력질주하는 동안 많이 힘들지는 않을까?
네, 맞습니다. 달리기는 경험 그 자체가 고통이자 괴로움이며 인내와 의지가 없다면 지속할 수 없는 경험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달리기는 굉장히 중독적인 운동입니다. 경험 그 자체는 고통스럽고 기나긴 통증의 연속인데도 달리기를 통해 사람들은 쾌감에 젖어들게 되고, 그 쾌감을 기억하는 뇌가 주인으로 하여금 계속 달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체(뇌)와 객체(몸)가 한 몸 안에서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더구나 고통으로 들어가라고 신체의 일부가 신체의 전체에게 요구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진화생물학의 시선으로 보자면 인간이 맹수를 맞닥뜨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 했고, 오랜 시간 뛰기 위해서 지친 몸에 대한 보상으로 뇌에서는 엔돌핀이라든가 도파민 같은 물질을 생성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화생물학의 분석은 그저 작동원리를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찾아낸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거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네 인생의 한 단면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관해 지적인 거인들이 남긴 말 중에 이런 말들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인고를 거치지 않은 안락은 없다는 말을 통해 안락의 선행적 조건으로 인고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도스터옙스키는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통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서 고통을 사랑했습니다.
이러한 작가들이 남긴 통찰은 현실을 충분히 반영한 나머지 너무도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시련괴 고통을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인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저 멀리 떨어진 결승점을 향해 끊임없이 팔을 휘두르고 발을 굴려가면서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저 역시 숨이 차오르는 고통을 참고 달리면서 그 문장의 뜻을 달리기에 빗대곤 했습니다.
이렇게 끝모를 고통을 참고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는 분명히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내면에 가득 들어찬 평정심을 누리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리라는 일념으로 끝까지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도 우리네 인생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요?
이게 바로 달리기의 쾌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10km든 21km든지 간에 뛰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시련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딱 그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속엔 평안이 가득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쾌감이 가슴속에 용솟음칩니다. 이건 단지 성취감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성취감은 일종의 해석적인 경향이 없다면 느낄 수 없는 희열입니다. 다시 말해 미래를 미리 상상해서 의미심장한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다지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달성한 목표가 달성 전후를 극단적으로 달라지게 만들 정도로 어떤 실질적인 보상이 따른다는 기대가 있을 때 강해지는 것이 보통의 성취감입니다. 그러나 달리기는 사실 달리기 전과 뛰고 난 후 극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기껏해야 땀에 젖은 옷과 조금 더 강해진 체력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취감에 의해 쾌감이 극적으로 높아지는 일과는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그리고 마라톤 풀 코스를 뛰고 나서 느껴지는 쾌감이란 것은 굉장히 즉흥적인 데다가 어떤 해석의 여지도 없이 즉각적으로 느껴집니다. 마치 아이스크림을 먹자마자 달콤한 맛을 즉각적으로 느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러너들은 이렇게 고통을 감수하고 얻게 되는 안락, 쾌감을 맛보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인 안락이야말로 어찌 보면 절대자가 우리 내면에 미리 설계해 놓은 인생의 비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의 쾌락도 실체가 없다는 점이 똑같습니다. 인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일목요연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가 즐겁게 웃고 떠들었던 그 시간들은 단지 순간에 불과했습니다.
많이 웃는 사람이 인생의 승자라고는 하지만, 승자의 말로가 죽음이라는 것치고는 상당히 유감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즐거워했고, 행복했고 또 그러기를 멈추지 않았던 걸까요?
우리가 그동안 누렸던 기쁨과 행복은 그저 잘 살기 위한 것에 불과했던 걸까요? 그러면 결국 죽음으로 마감하는 생의 선물은 사라지고 마는 실체가 없는 것에 불과한 걸까요?
이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부단히 고민했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답을 알려주시기 위해 몸소 이 땅에 오셨던 분도 계십니다.
종교적으로 의미를 찾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다른 분야에서 실체를 찾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모르긴 해도 그렇게 해서 찾게 된 그 무엇은 모두 각자의 몫일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저는 도무지 답을 드릴 요령이 없습니다. 제 능력이 그에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러너들은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제가 경험했던 JTBC 현장을 묘사하면서 얘기를 더 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