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의 쾌락은 실체가 없다.
1.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우연
3년 전까지만 해도 누가 저에게 같이 마라톤을 하자고 말했을 때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하곤 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체력이 부족하다는 생각과 함께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등산을 포함해 다른 서너 가지의 취미생활을 하면서 마라톤까지 병행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또한 풀코스에 도전할 정도로 체력을 키우기엔 제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웬만한 사람들의 인식처럼 마라톤은 인간 체력의 한계점에 도전하는 종목이기 때문에 뭔가 너무 거창하고 과도한 취미활동이 아닌가 싶어 고개가 갸우뚱거리곤 했던 겁니다.
더구나 매주 산행을 다니고 있는데 굳이 마라톤까지 도전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건 등산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등산은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운동이어서 숨겨진 매력이 있습니다.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어떤 생각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정말 재미있습니다.
저에게 등산은 사유를 음미하는 시간입니다. 올라가기 전에 어떤 생각거리를 하나 짊어지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마법 같은 시간을 선물처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마라톤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춘삼월의 어느 날 오전에 네이버를 열었더니 JTBC 마라톤 래플을 한다는 공지를 우연히 보게 된 덕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 뛰어 본 결과 중독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등산보다는 달리기가 훨씬 강력한 흡입력을 갖고 있습니다.
2. 꾸준한 취미활동이 되기 위한 조건들
오래가는 취미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보통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1) 초기 접근이 쉬어야 하며(낮은 진입장벽), 2) 빠지면 빠질수록 그 세계가 깊고 넓어야 하고(고유한 세계), 3) 마지막으로 중독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마라톤은 가장 강력한 취미생활로 자리잡기에 아주 좋습니다.
우선 달리는 것은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을 만큼 초기 접근이 용이합니다. 그만큼 단순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라톤이라는 세계에 빠지면 빠질수록 이 세계 또한 굉장히 넓고 심오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훈련할 때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접근방식이 가능합니다.
천천히 달려야 빨라진다는 역설을 강조한 8020법칙이라는 훈련법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보니깐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또한 마라톤은 중독성이 정말 강력합니다. 제가 빠져 본 취미생활 중에서 마라톤만큼 쾌락의 강도가 강한 건 없었습니다.
재미라는 측면에서 볼 땐 그저 종류가 다를 뿐이라서 다른 취미활동의 재미와 비교해 무차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마라톤으로 인한 재미가 다른 재미를 압도한다고 말씀드리기엔 조금 어렵습니다.
쌀밥이 아무리 맛있더라고 해도 다른 음식의 맛까지 싹 잊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달리기의 쾌락은 실체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자신의 두 다리로 뛰어서 얻게 된 쾌락인데 무슨 실체가 없냐, 경험만 한 실체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땐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달리기의 쾌락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에 더 가까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쾌락은 보통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경험을 통해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에 쾌락을 느끼곤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안 미각의 쾌락을 느끼게 되고, 감성적인 음악을 듣는 동안 청각의 쾌락을, 훌륭한 회화 작품을 감상하면서 시각의 쾌락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경험 그 자체가 기쁨이고 희열이자 쾌락의 원천이 됩니다. 그런데 달리기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은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10km, 20km, 40km를 전력질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생각부터 드나요?
숨이 덜컥 막히지는 않을까? 전력질주하는 동안 많이 힘들지는 않을까?
네, 맞습니다. 달리기는 경험 그 자체가 고통이자 괴로움이며 인내와 의지가 없다면 지속할 수 없는 경험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달리기는 굉장히 중독적인 운동입니다. 경험 그 자체는 고통스럽고 기나긴 고통과의 싸움인데도 불구하고, 달리기를 통해 사람들은 쾌감에 젖어들게 되고, 그 쾌감을 기억하는 뇌가 그 주인으로 하여금 계속 달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쾌락을 느끼는 주체(뇌)와 쾌락의 수단인 객체(몸)가 한 몸 안에서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더구나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가라고 신체의 일부가 전체에게 요구하는 이상한 일까지 벌어지기도 합니다.
3. 우리네 삶과 닮은 점
이런 현상을 진화생물학의 시선으로 보자면 인간이 맹수를 맞닥뜨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 했고, 오랜 시간 뛰기 위해서 지친 몸에 대한 보상으로 뇌에서는 엔돌핀이라든가 도파민 같은 물질을 생성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화생물학의 분석은 그저 작동원리를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찾아낸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물리학도 기껏해야 물체가 움직이는 운동 법칙을 설명하는 것뿐이지 물질의 본질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거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네 인생의 한 단면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관해 지적인 거인들이 남긴 말 중에 이런 말들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인고를 거치지 않은 안락은 없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통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도 우리네 인생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요?
이게 바로 달리기의 쾌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10km든 21km든지 간에 뛰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시련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딱 그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속엔 평안이 가득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쾌감이 머릿속에서 용솟음칩니다. 이 쾌락은 단지 성취감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성취감은 일종의 해석적인 경향이 없다면 느낄 수 없는 희열입니다. 다시 말해 도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미래를 미리 상상하고 그 모습에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심장한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다지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기진맥진 기력이 다 빠진 채 집으로 돌아가기 바쁠지도 모릅니다.
달성한 목표가 달성 전후를 극단적으로 달라지게 만들 정도로 어떤 실질적인 보상이 따른다는 기대가 있을 때 강력해지는 것이 보통의 성취감입니다.
그러나 달리기는 사실 달리기 전과 뛰고 난 후 극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체력적으로 안 좋아질 뿐입니다.
기껏해야 땀에 젖은 옷과 조금 더 강해진 체력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취감과 마라톤 그 자체가 주는 쾌감이 어느 순간 극단적으로 높아지는 일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라톤 풀 코스를 뛰고 나서 느껴지는 쾌감이란 것은 굉장히 즉흥적인 데다가 어떤 해석의 여지도 없이 즉각적으로 느껴집니다. 마치 아이스크림을 먹자마자 달콤한 맛을 즉각적으로 느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러너들은 이렇게 고통을 감수하고 얻게 되는 안락, 쾌감을 맛보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인 안락이야말로 어찌 보면 절대자가 우리 내면에 미리 설계해 놓은 인생의 비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의 쾌락도 실체가 없다는 점이 똑같습니다. 인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일목요연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가 즐겁게 웃고 떠들었던 그 시간들은 단지 순간에 불과했습니다.
많이 웃는 사람이 인생의 승자라고는 하지만, 승자의 말로가 죽음이라는 것치고는 상당히 유감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즐거워했고, 행복했고 또 그렇게 되기를 멈추지 않았던 걸까요?
우리가 그동안 누렸던 기쁨과 행복은 그저 잘 살기 위한 것에 불과했던 걸까요? 그러면 결국 죽음으로 마감하는 생의 선물은 사라지고 마는 실체가 없는 것에 불과한 걸까요?
이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부단히 고민했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답을 알려주시기 위해 몸소 이 땅에 오셨던 분도 계십니다.
종교적으로 의미를 찾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다른 분야에서 해답을 찾고자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모르긴 해도 그렇게 해서 찾게 된 그 무엇은 모두 각자의 몫일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저는 도무지 답을 드릴 요령이 없습니다. 제 능력이 그에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 나머지 이상한 곳으로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군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제 고작 마라톤 풀코스를 한번 완주해 본 게 전부이기 때문에 마라톤의 즐거움에 관해 종지부를 찍으려고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다만, 풀코스를 준비하는 동안 훈련하면서 느낀 점들과 풀코스 완주 후 체감했던 묘한 쾌락의 시종을 쫓아가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했었습니다.
길고 지루한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남기며 펜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