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95km: JTBC 마라톤

마라톤 풀코스 별거 아니다.

by 이각형


1. 마라톤 풀코스 도전에 나서게 된 사연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겠다고 나선 건 그야말로 우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3월 말쯤 핸드폰을 보고 있었을 때 네이버 메인 화면에서 JTBC 마라톤 참가신청 홍보문구를 보고 손으로 눌러본 게 유일한 동기였습니다.



2년 전부터 필라테스 선생님께서 마라톤을 뛰어 보자고 권유했을 때마다 아직 그런 체력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곤 했었습니다. 2년 전만 해도 10km를 딱 2번 정도 달려 본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하지만 산에선 뛰어다니곤 했으니 마라톤도 연습만 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생각은 줄곧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체력적 한계를 경험하는 일을 무척 즐겨왔기 때문에 도전정신을 한 번쯤 더 발휘하는 게 무턱대고 용기를 내는 일로 치부될 정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마라톤을 시작하기를 꺼렸던 건 다른 게 아니라 부족한 시간 때문이었습니다. 등산만 다녀와도 최소 3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한정된 시간만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등산이라는 취미에 마라톤까지 시작하게 되면 책을 읽거나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아무튼 무모한 도전까지는 아니었지만 우연한 기회로 시작한 이 도전은 어제 11월 2일 자로 무사히 끝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42.195km를 달려본 소감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열심히 뛰어가면서 사실 힘이 남아돌았습니다. 그래서 결승점을 향해 뛰면서 옆에서 달리던 한 참가자에게 "저기가 바로 끝이냐?"라고 물어봤더니 고개를 끄덕여줬습니다.



무사히 완주했다는 기쁨에서였는지, 아니면 마라톤 사실 별거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두려움이 사라져서였는지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저는 괴성을 내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어떤 해방감에서 저도 모르게 가슴속에 차 있던 울분이 허공으로 쏟아져 나온 것 같습니다.



어제 제 나름대로 경기를 운용하면서 힘을 최대한 비축해 놓고 주행을 해 나가자라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첫 하프 마라톤에 나갔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선두에서 출발했다가 초반에 힘을 다 쓴 나머지 후반에 고전했던 기억이 너무도 뼈아프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계획을 도와준 건 바로 1만 7천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참가들이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 15km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속도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양화대교를 건너고 노들길을 통해 여의도로 들어설 때까지 거의 걷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은 좁은데 달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도저히 앞으로 치고 나갈 틈이 없었습니다.



이때는 좌충우돌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휘두르는 팔이 다른 사람을 치기도 했고, 반대로 또 다른 사람의 발길질과 팔에 제가 치이기도 했습니다. 주로의 폭이 좁은데 달리는 사람이 그렇게 많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힘을 아껴가며 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마도 마지막까지 쉬지도 않았고 막판 스퍼트가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42km 구간의 구간속도(구간 페이스: 5분 24초)가 가장 빨랐을 정도로 힘이 남아 있었습니다.



결승점에서도 10km는 더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힘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소위 마라톤은 30km에서 시작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30km 전까지는 그냥 몸을 푸는 구간이고, 30km 이후 중후반부를 어떻게 잘 운용하냐에 따라 완주 또는 기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프코스에 다다르자마자 하나둘씩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었습니다.



27km 군자교 오르막 구간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고, 잠실대교를 지나 수서 IC의 짤디짧은 오르막에서는 대다수가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구간인 41km에서 1km 동안 이어지는 길고 긴 오르막 구간에서는 피니쉬 라인이 코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의 뛰질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상대적으로 제가 달리는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빨라졌습니다. 그래서 수백 명의 사람들을 제치고 막판에 다리에 힘을 주고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3. JTBC 코스에 관하여



JTBC 풀코스는 서울 도심을 서동으로 가로지르기 때문에 상당히 좋은 코스라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리고 JTBC코스는 업힐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업힐이 정말 무시무시한 오르막길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업힐 구간은 총 세 군데 정도였습니다.



우선 11km쯤이었던 애오개역에서 충정로역까지 이어지는 긴 오르막길입니다. 가장 길고 가팔랐던 업힐이었지만 여기까진 초반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잘 치고 올라갔습니다.



이 구간에서 힘 고르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를 제치고 앞서 달려가는 선수들이 많았었습니다. 그렇게 앞서가는 선수들의 등을 바라보면서 어차피 결승점에서 다 같이 만날 거라는 말로 자신을 다독이며 오버페이스를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세 개의 업힐 중 그나마 조금 힘들다고 여겨진 업힐은 27km쯤에 나오는 군자교였습니다. 아무래도 대회가 중반에 이를 정도가 되니까 체력이 고갈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구간에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걷고 있었고 함께 뛰고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의 평균속도도 굉장히 느려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도움을 받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26km쯤에 설치된 급수대에서 초코파이와 바나나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지기 전에 먼저 에너지를 보충해야 했기 때문에 이온음료와 초코파이 그리고 바나나를 1분 만에 잽싸게 먹어치우고 달린 것이 군자교 업힐을 잘 넘어갈 수 있었던 주효한 포인트였습니다.



그리고 잠실대교를 건너고 잠실역 근방에서 아미노겔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3개를 챙겨서 2개를 달리면서 먹어치우고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에너지젤보다 아미노젤은 그 효과가 훨씬 뛰어납니다. 예전에 공룡능선을 타러 갔을 때에도 아미노겔 1포로 밤새 운전해 달려와 지친 몸과 정신을 한 번에 깨울 수 있었는데요, 어제도 아미노젤 2개를 먹고 나니 갑자기 정신이 또렷해지고 온몸에 힘이 다시 솟는 듯 전혀 피곤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업힐 구간이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올림픽공원 2km 전방에서 시작해 약 1km 정도 이어지는 이 업힐은 후반부 레이스에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구간이었습니다.



업힐을 무리해서 달리게 되면 다리에 경련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경련으로 남은 1-2km를 걸어야 하고 결승점에서 절뚝이게 될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게 달려야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경기 운용을 잘했던 탓에 1km 동안 이어지는 언덕길을 별다른 부담 없이 잘 달려 나갔고, 언덕의 끝 평지에서 좌회전을 통해 커다란 결승점이 눈앞에 보일 때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4. 마의 벽 35km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은 35km 지점이 가장 힘들다,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저는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35km를 지났는데도 특별히 어디가 아프거나 힘이 떨어지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주위 경치를 감상하면서 여유롭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라톤은 초중반까지는 몸을 푼다는 생각으로 리듬감 있게 달리는 전략이 중요합니다.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하게 되면 하프 정도에서는 걷게 되기 십상입니다.


아 물론 딱 한 번 통증이 강하게 온 적이 있습니다. 37km쯤에서 또 초코파이를 주길래 멈춰 서서 이온음료랑 먹고 다시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왼쪽 무릎 바깥쪽으로 아주 날카로운 통증이 스쳐지나갔었습니다.


바로 장경인대증후군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통증은 지난 11년 동안 등산을 하면서 숱하게 경험해 봤기 때문에 이런 통증은 원래 운동을 많이 하면 발생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거라고 여겨 왔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참고 달리면 언젠간 이 통증은 익숙해지거나 사라진다는 생각으로 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1km도 지나지 않아서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그 외에는 특별히 아프거나 통증이 있던 곳은 없었습니다.





5. 대회를 마치며 남은 아쉬움



처음으로 달려 본 42.195km를 4시간 17분 만에 완주한 것도 제 나름대로 기뻐할 만한 기록이긴 합니다. 하지만 내심 4시간 10분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약간 아쉬움이 남습니다.


초반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던 점도 있고, 또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화장실에 가려면 대기줄이 너무 길게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소변을 보지 못한 게 좀 패착이었습니다.


대회가 시작하자마자 5분이 지나서 바로 길가 건물로 들어가 급한 볼일을 해결하느라 대략 2-3분 정도 손해를 봤습니다. 월드컵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7시에 화장실에 들였었지만, 8시 23분에 출발하기까지 추운 날씨 속에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아마도 화장실을 한 번 더 다녀왔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아쉬운 점은 42.195를 달려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힘을 다 쏟아붓고 달려야 할지를 판단할 수 없었던 점입니다. 군자교에서도, 잠실대교에서도 힘이 남아돌았지만 여기서 힘을 쓰면 막판에 어찌 될지 모른다면서 애써 힘을 아껴온 터라 그냥 평이한 속도로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37km 수서 IC에서부터는 슬슬 속도를 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씩 속도를 높여갔습니다. 그렇게 했지만 결승점에서 여전히 힘이 좀 남아서 5~10km 정도는 더 뛸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전략적으로 미숙한 점은 다음 대회를 준비하면서 혼자 풀코스에 가까운 장거리 훈련을 통해 점점 더 경험을 쌓게 되면 저절로 보완하게 될 것이고 제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생각해 보면 마라톤 풀코스 첫 도전자는 2달 전부터 꼭 장거리 훈련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경기 중후반부에 걷거나 속도를 줄여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발은 아주 화려한 카본화를 신었지만 장거리 훈련을 안 한 티가 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다음 대회에서는 저도 부족했던 정거리 훈련을 더 보강해서 SUB4의 목표로 달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에는 3시간 30분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앞으로 더 마라톤을 즐기면서 훈련하고 싶습니다.


마라톤,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뛰는 동안은 생각할 틈도 없고 호흡과 달리기의 리듬감에 집중하게 되지만 뛰고 나면 정말 실체가 없는 묘한 쾌락이 몰려옵니다.


실체가 없긴 하지만 아마 이런 묘한 쾌감 때문에 한국의 마라톤 인구가 1천만 명을 넘기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긴 연휴 동안의 훈련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