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조진웅 씨와 관련된 일이 회자되곤 했습니다. 사태가 번져가는 모습은 마치 들불이 퍼지는 것처럼 순식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결론도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나왔습니다. 뉴스가 터진 지 이틀 만에 사건의 당사자가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평소 연예계 뉴스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게 되면 저는 마치 이방인과 같은 입장이 되고 맙니다. 물론 이방인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눈과 귀가 있어 사건이 돌아가는 태세를 보며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점에 관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조진웅 씨와 관련된 일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법률적인 관점과 또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관점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저는 법률에 관해선 문외한이기에 소신껏 말할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적습니다.
그리고 조진웅 씨는 현행법을 위반해 처벌받은 과거를 숨긴 것뿐이지 지금 현재 범죄자의 신분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합니다. 사회에서 정한 벌칙, 자신의 죗값을 치른 상태입니다.
과거 폭력전과가 있지만 형량을 모두 채웠고 그 결과 자신의 꿈을 찾아 배우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도 거침없던 옛 습성을 미처 다 버리지 못해 폭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뉴스에 나오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공인이 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현재와 미래의 범죄를 숨길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의 범죄까지 숨길 수 없는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타의에 의해 밝혀진 과거의 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은퇴를 선언한 후 사태의 향방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여기까지의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는 배우로서 활동할 때 아버지의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나쁘게 보자면 과거를 숨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그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오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보자면 아버지 이름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못난 과거와 단절을 선언한 그만의 독특한 결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이름은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만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이름을 차용해 다신 그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자라는 굳센 의지를 담은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양분된 해석 사이에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조진웅 씨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저는 조진웅 씨가 후자의 선택을 했던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분명한 것 중에 다른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법률보다는 도덕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태를 도덕의 눈으로 보면 어떤 풍경이 그려지는지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이 얘기를 진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도덕에 관해 먼저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C.S. 루이스에 따르면 도덕에는 크게 세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그 세 층위 중에서 우리는 보통 첫 번째에 관해서만 예민한 편이고 나머지 두 개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
도덕의 첫 번째 층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된 사회적 도덕입니다. 각 개인이 서로 공정하게 행동하며 조화를 이루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 층위는 각각의 개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정돈하고 단련시키며 조화롭게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 번째 층위는 인류라는 전체의 집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삶이 지행해야 하는 보편적인 목적, 즉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통 첫 번째 층위에 관해서는 빠르게 인식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는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덕은 식별하기가 매우 쉽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영화관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데 누군가가 새치기를 하면 금방 그 사람의 행동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조진웅 씨가 과거를 숨긴 점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대중들이 항의하기 시작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중들의 항의가 마치 정당하기만 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층위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각자에게 또 다른 숙제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 이제 우리들 각자의 내면을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들 마음속에 도덕적 특질이 잘 내재되어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정직하게 행동하려고 하며 거짓말을 한 적도 없고 남의 것을 훔친 적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 사람의 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는 도덕적 행동을 꾸준히 했던 사람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네, 그렇게 살아온 분이 계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를 칭찬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도덕적 행동이 마치 도덕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도덕의 밑바탕은 도덕적 행동이 아니라 도덕적 특질이 내재화된 개인의 내면입니다. 이것은 어쩌다 다른 동기나 목적을 위해 도덕적 행동을 내린 것에 불과한 일을 도덕으로 승화시키지 않게 도와줍니다.
아마추어 야구 선수도 가끔은 강한 스윙으로 홈런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프로야구의 홈런왕은 이러한 스윙을 수없이 연습하고 실전에서 발휘함으로써 홈런왕의 특질을 체득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홈런왕은 타석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더그아웃에 있을 때에도 상대 투수의 공을 보면서 홈런을 만들어 내기 위한 운동신경과 신체의 반응을 연습하고 있을 겁니다.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 TV 화면으로 야구 중계를 보면서도 투수의 공을 보면서 홈런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선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즉 그 선수는 평상시에도 홈런왕으로서의 특질을 눈에 보이지 않게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적 특질이 잘 내면화되어 있어서 그 사람이 보는 수많은 시선마다 도덕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고 자신이 행동을 해야 할 때마다 수없이 갈고닦았던 내면의 도덕적 특질이 행동으로 발현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제가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도 부족한 인간에 불과하고 순결한 도덕적 삶은 어떤 것인지조차 그려내지 못합니다. 다만 도덕의 순결한 삶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이것저것 책을 읽고 귀담아들으려고 애쓰는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단 한 번의 도덕적 행동만으로는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치-도덕적 특질이 내재화되기 위해서 필요한 수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성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우리 각자의 내면을 보게 되면 어떤 모습이 보일까요?
우리는 아직 도덕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이미 도덕적인 인간이었다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자신에 의해 도덕적인 환경을 누리고 행복해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가 되었다면, 우리 사회가 도덕적으로 보다 풍요로운 사회이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조진웅 씨 같은 일은 애초에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대중의 폭발적인 비난과 힐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19세기를 살아온 따듯한 마음의 러시아 작가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관해 모든 사람에게 죄인이다.
만일 우리가 사랑의 눈으로 조진웅 씨의 어린 시절과 현재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모르긴 해도 우리는 비난과 힐책보다는 먼저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에게 용서와 관용 그리고 자비를 베풀기로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른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러고선 예수님께 이 여자의 죄를 어떻게 단죄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있던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집중하느라 듣는 채 마는 채 하시더니 이윽고 일어나시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이는 돌로 이 여자를 쳐라."
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대중의 반응에는 이러한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이라는 것 말입니다.
르상티망은 약자가 강자에게 감정인 원한이라는 것입니다. "약자가 강자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 등이 뒤섞인 감정"이라고 니체는 설명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기심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러한 르상티망은 감정이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에 의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 감정에 예속되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르상티망의 원인이 되는 가치기준에 부합되거나 동의함으로써 그 감정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골프를 치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 사람의 가치관은 주말에 골프장에 가서 비싼 그린피를 내고 그것보다 더 비싼 8시간 이상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과는 정반대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과 멀어지지기보다는 함께하기 위해서 억지로 골프를 치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소위 명품백이라고 불리는 고가의 사치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치품이 매긴 가격에 의해 인위적으로 구별되는 계급의식에 반대하는 가치관을 갖고 있지만, 과시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가방을 구입함으로써 사치품에 대한 불합리한 감정을 해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 감정을 해소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치즘이 바로 그렇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전쟁비용을 부담하고 있던 독일의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불만을 품고 승전국의 논리에 반대하여 들고일어난 나치는 현실인식을 바르게 하지 못해 특정한 민족을 대상으로 역사적 아픔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열등감을 노력이나 도전으로 해결하지 않고, 열등감을 불러일으킨 대상 그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자신(독일)을 긍정하려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제가 여기서 독일 민족이 열등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왜곡된 현실 인식이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러한 비극을 탄생시키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드리는 말씀일 뿐입니다. 물론 나치의 경우는 굉장히 극단적인 예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치의 경우보다는 조금은 약한 반응이긴 하지만, 조진웅 씨 사건을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가 바로 이 시기심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대략 95%가 서민입니다. 여기서 서민의 기준이란 내일 당장 일을 그만두면 생계에 문제가 발생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을 통해 먹고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유명한 배우나 스타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환호하고 팬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기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격무에 지나치게 시달리거나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큰 충격이 생기면 그 사건의 원인을 남 탓으로 규정하기 마련입니다. 쉽게 말해 삶이 거칠고 힘들어질수록 우리는 스스로 남들에게 더더욱 인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누구는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경제적 자유를 얻었다더라, 누구는 청약을 잘해서 강남에 몇십 억짜리 아파트를 샀더라, 누구든 투자한 주식이 대박 나서 큰 부자가 되었다라는 소리를 요즘엔 너무 쉽게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런 소식이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자신의 현재 모습과 비교하면서 우울한 하루, 더 나아가 인생 자체를 비관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공인 중 한 명이 과거의 패악질이라든가 범죄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득달같이 일어나서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가 마치 그 사람 때문이었다는 듯이 그를 향한 비난과 질책을 서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 시대 때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황제가 열었던 노예들의 칼싸움과 마찬가지입니다. 꾹꾹 눌러왔던 분노를 분출할 수 있는 어떤 통로이자 대상인 것만 같습니다.
매일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이 보기에 조진웅 씨가 누리고 있는 명성과 부는 불합리하다고 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감정은 조진웅이라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아닙니다.
잠재되어 있어서 언제든 터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그 감정이 조진웅 씨의 사건으로 인해 한꺼번에 터진 것일 뿐입니다. 조진웅 씨에 대한 폭로가 잠재된 분노가 폭할게 된 기폭제이자 도화선이었던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진웅 씨의 행동에 잘못이 없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저로서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과거를 숨기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그에 걸맞은 여러 가지 노력을 평소에 기울여 왔다면 기자의 폭로에 대중이 이렇게까지 분노를 터트렸을까를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남기 마련입니다.
조진웅 씨가 알게 모르게 과거를 반성하며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기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그 모습을 그저 이중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우리 모두가 자애로운 마음을 갖고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항상 도덕적 특질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면 우리들이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사회라는 무대에서 내쫓기까지 했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기자의 폭로가 이어진 뒤 조진웅 씨가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후회하고 있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은퇴를 발표하기 전에 조진웅 씨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을 겁니다.
사람들은 조진웅 씨의 강직한 모습을 보고 좋아했었을 겁니다. 그런 그의 장점이 오히려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단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여전히 제 자신의 모순적인 모습이 연상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이 글을 쓰다가 말곤 했습니다.
특히나 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배척되는 모습을 보면서 타인을 판단하는 일이란 정말 어렵고 모질고 무서운 일이라는 점을 더더욱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조진웅 씨와 관련해서 어떤 법률적 투쟁이 오갈지도 모르지만 그의 과거 잘못은 미워해도 되지만 조진웅 씨 한 사람에게는 자비를 내릴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길 기원할 따름입니다.
인간은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이 도덕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정말 큰 오만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늘만큼 제 글에 대해서 자신이 없기는 처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