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1주년

by 이각형



얼마 전이 내란 1주년이었습니다. 역시나 우리의 기대보다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인식은 세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우리의 기억은 특별한 기능을 부여받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에는 무디지만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은 파릇파릇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그날을 기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대통령이 그날을 기념하여 특별담화를 나눴듯이 저마다 그날을 기념하며 한 마디씩 했습니다. 누구는 정의론을 거론하며 능력주의와 엘리트의식이 지닌 폐단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연법에 관한 것입니다.


우우리는 도덕적 판단이 요구되는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모두 마음속으로 '아,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어떤 목소리를 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한 약속을 지킬지 말지 고민할 때 우리들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직감하곤 합니다.

그 목소리에 전적으로 의존했을 때 2024년 12월 3일 밤 10시에 우리는 어떤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었는지 기억을 반추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21세기에 무슨 계엄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대한민국 역사에 약 십여 차례의 계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계엄이 1980년 5월, 자그마치 44년 하고도 7개월 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송년회에 한창 빠져 있던 국민들의 핸드폰에 "계엄령 선포"라는 뉴스가 뜨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을 솔직한 마음으로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아마도 대부분 '21세기에 무슨 계엄령이야?'라고 반문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 마음속에 어떤 도덕적 기준이 이미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기준이 없었다면 계엄이 선포되든지 말든지 놀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내 옆에서 폭탄이 터져서 놀라게 된다면, 폭탄이 터지기 직전까지 폭탄이 터질 리가 없을 거리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대가 없이 정확히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폭탄이 어디서 터질 걸 알았다면 그 뉴스에 놀랄 일이 없습니다.

마치 이것은 물고기가 자신이 축축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육지생활을 하는 존재만이 물에 빠졌을 때 습기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당시에 이건 아닌데라는 첫인상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일정한 기준, 다시 말해 자연법이자 도덕률이라는 기준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없다면 어떤 현상에 대해서 정상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까지의 논의를 기반으로 2024년 12월 3일 계엄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기필코 정상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다들 의아했으며 이것이 뉴스로까지 보도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뒤의 반응은 자신이 어떤 편에 서 있냐에 따라 양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의 반응은 불순물이 섞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첫맛에 우리는 '오우, 이거 정말 맛있는데!'라고 직관적으로 느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떤 단점이나 한계를 알아차리게 된다면 그때 우리가 그 음식에 대해서 갖는 태도는 불순물이 섞인 그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편이냐 저편이냐를 결정하려면 우리는 눈치싸움 혹은 실리주의적 계산 또는 자신이 그동안 꾸준히 유지해왔던 가치판단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어떤 사건에 대한 첫인상 이후에 자신의 태도가 달라졌다면 이러한 과정, 자신의 상황에 맞는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선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태도의 변화, 사건 발생 최초 시점과 달라진 그것은 불순한 것들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떤 신비로운 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덕률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모님과 학교를 통해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도덕률은 기껏해야 교육의 산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교육의 계보의 기원을 찾기 위해 선대의 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우리는 결국 똑같은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옳지 못한 일은 하지 말라는 신비로운 목소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우리네 유기체의 삶은 단순히 우연한 사건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만일 인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려면 인생은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광활한 우주에 빛이 없다면 우주는 어둡다는 말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빛의 반대편이며 빛을 지각하려면 빛을 인식하는 시각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결국 단순한 논리오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자신의 인생이 의미 있다고 믿고 있다면 과연 우리들은 어떤 관점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일까요?

즉 우리에게는 명백한 도덕률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도덕률, 참된 선을 지향하도록 설정된 그 방향성은 누가 과연 부여한 것인가요?

그걸 모른다고 해도 우리 내면에는 여전히 그 도덕률, 참된 선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2024년 12월 3일 밤 10시에 그토록 놀랐던 것입니다. 그러한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조차도 계엄은 위선이자 패악이며 파멸에 이르고 마는 악행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네 일상을 위협할 뻔했던 그 순간의 인상을 떠올리신다면 제 얘기에 동의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마터면 동네 카페를 가려고 할 때의 자유가 침해될 뻔했습니다.

허락을 받아야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삶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갑갑하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로선 참된 선과 정의 그리고 도덕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실재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C.S. 루이스의 도움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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