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낙타

by 이각형


역시 책과 영화가 영감의 원천이 되곤 합니다. 이는 박웅현 씨도 마찬가지로 언급했던 점이기도 합니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모든지 환영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보통 책과 영화에서 영감을 자주 받곤 합니다.

요즘 신학 서적을 읽으면서 어릴 땐 잘 몰랐던 것들을 하나둘씩 깨닫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저에게 다가온 깨달음은 부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모두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다 같을 것입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힘든 직장생활을 그만하고 싶다거나 시간을 더 여유롭고 즐겁게 누리기 위해서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보다는 더 즐거운 무언가를 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중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히 부자가 욕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나라 전래동화에서도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가 비슷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놀부는 더 많은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서 제비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리자 더 큰 화를 면치 못하기도 하잖습니까.

그래서 어린이로서 제가 배운 건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욕심 그 자체가 나쁜 것이라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건 재앙 그 자체이기도 하는 얘기입니다.

단순히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지옥에 간다는 건 뭔가 좀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관찰해 얻은 결론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궁금증을 명쾌하게 해설해 주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읽고 있는 서적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단서를 현대사회의 슈퍼리치들에게로 확장시켜 본 결과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슈퍼리치들을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아니, 그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부터 관찰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회사 로비에서 대표이사를 만나던가 길거리에서 재벌들을 마주쳤다고 생각해 보시죠. 우리들은 아마 허리를 굽혀 절 하듯이 인사를 할 것입니다.

그런 인사를 받는 재벌들은 어떤 기분에 빠져들까요? 아마 자신이 굉장히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잘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사람들은 보통 큰 숫자를 가진 사람을 우러러보고 있고, 큰 숫자를 가진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재벌들은 자기 위에는 사람이 없고 아래로만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재벌들 중에는 자신의 위엄이라든지 부가 가져다주는 명성 등에 기댄 채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자주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재벌들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평생 쓰고도 남을 재산이 있는데도 왜 그렇게 열심히 또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인지 저로서는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재벌들끼리는 자신의 사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이익이라는 숫자의 크기가 하나의 갱졍이라고도 합니다. 자신들이 소유한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이라는 숫자가 단지 돈이 아니라 명예와 결부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그 말은 너무 좋게 말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교만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경쟁적인 속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임에 나가서 어떤 사람이 유독 거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곧 그 모임에서 가장 주목받고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 뛰어나 보이거나 두드러지려고 하는 사람이 보인다면 그렇게 꼴 보기가 싫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만은 곧 투쟁적이고 경쟁적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교만은 경쟁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이 자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만큼은 가장 위대한 사람,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믿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는 그런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이라야 하늘의 위로를 받고 천국이 그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겸손은 무엇일까요?

겸손이라는 미덕 또한 저는 어릴 때부터 잘못 알고 있었던 것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겸손이라는 게 그저 자신을 낮추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을 낮추는 일, 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인가요?

이 또한 신학 서적에서 알려준 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잊고 있는 사람, 또는 자기 자신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어떤 책에서는 겸손을 자기 지산을 지우는 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 책은 신학 서적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재벌에게 어떤 사람이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쳤다고 생각해 보시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아마 그 재벌은 매우 화가 날 것입니다.

자기 위로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마치 윗사람이 깔보는 듯 인사도 없이 사람이 지나가 버리면 화가 날 게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선 자기가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사람은 똑같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현실에서도 큰형이 동생 앞에서 잘난 척하면서 무시하게 되면 부모님들의 마음을 슬픔으로 물들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큰아들이나 작은아들이나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은 교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욕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현생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그들의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자들의 행실이 난폭하고 이기적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못살게 굴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부자들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교만과 겸손이 바로 그 주제였던 것입니다.

만일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더라도, 단지 자신이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 나눠주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겸손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베풀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몇 달을 매진하게 된다면 저절로 그런 마음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건 마치 이런 것과 같은 일입니다.

(실제로 사랑하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여기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잘해주고 위하게 되면 결국 그 사람에 대한 좋은 마음이 커져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해가 안 가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싫어서 그 사람을 박대할수록 우리는 그 사람을 점점 더 미워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박해한 것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나치는 유대인이 미웠기 때문에 학대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리고 학대하면 할수록 학대가 가해질수록 유대인을 더 혐오하게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나쁜 감정이 나쁜 행동을 통해 더 깊어지고 심화되듯이 좋은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에 결론을 내려본다면 아마 이런 얘기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이 삶은 천국에서의 삶에 필요한 미덕들을 갖추기 위한 무대라는 점입니다. 즉 부자라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부자여도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채 세상을 향해 사랑을 실천한다면 부자라고 해서 천국에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 기독교인들마저도- 기독교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니체는 기독교를 르상티망이라는 철학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약자들(유대인)이 강자(로마인)들에 대한 원한을 풀어내기 위해 기독교를 개발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니체야말로 부정적 르상티망에 찌들어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젤대학교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었을 때 비극의 탄생이라는 논물을 발표하고 난 뒤 동료 교수들에게서 왕따를 당했습니다. 버티다 못한 니체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야인생활을 하면서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견고한 척하며 비판적이고 철학적인 책들을 출간하면서 뒤로는 바젤대학교 학장에게 복직을 구걸하는 비굴한 내용의 편지를 몰래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강자의 압제에 항거하는 약자들에 대해서 르상티망이라는 독특한 철학적 개념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삐뚤게 바라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비틀어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미워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가장 행복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주어졌으면 하는 소망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이 점점 더 각박해지는 건 이 세상에 돈이 부족해지고 있어서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모바일 통신이 발달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세상에 큰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구멍으로 세상의 온기가 다 빠져나가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도덕이 사라진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