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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Feb 08. 2024

쓰기 위해 읽는 것에 관하여

진실된 역사적 사실은 사료나 사건이 아니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진화이다.


몇 해 전 어떤 글을 읽다가 갑자기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글쓰기에 관한 모임을 만들어 함께할 사람들을 모집하는 었다.


그 모임을 발의한 사람은 모임의 목적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 위해 읽는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글쓰기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읽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글쓰기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독서보다 글짓기가 지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물론 글을 쓰는 일이 읽기보다는 훨씬 더 정신을 요구하는 일임에는 지명한 사실이다.


자신의 빈약한 논거를 보충하기 위해 그는 다른 사람을 끌어들였다. 초보 에세이 작가의 책, '나는 쓰기 위해 읽는다'라는 책을 소개하며 자신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논리적 글이 갖춰야 할 형식으로 보자면 그의 인용은 꽤나 그럴듯해 보였지만 이는 오히려 자신의 논리적 결함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그의 주장곰곰이 따져보면 어딘가 전후가 뒤바뀌었거나 혹은 글쓰기를 위한 마르지 않는 샘물을 다른 데에서 파악한 결과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약간의 기억력을 동원하기만 해도 그 사람의 주장에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고전을 남긴 훌륭한 작가들의 발자취를 반추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내로라하는 작가들 중에서 쓰기 위해 글을 읽었다는 고백을 남긴 이가 있는가? 오히려 대문호들은 인생에서 다른 직업을 구할 틈도 없이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쓸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헤르만 헤세는 이를 염두에 두면서 노벨문학상 수상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글쓰기는 주관적 경험이라는 범주에서 결단코 벗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자신의 경험 속에서 현실의 밑바탕을 이루는 어떤 가치라든가 진리를 발견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환언하자면 경험을 통해 응어리진 가슴이 절박한 심정일수록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절박함이 글쓰기라는 수단을 만나면 탄생하는 것이 바로 글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음악가도 화가와 마찬가지다.


물론 선배 화가들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며, 작가들도 자신의 글쓰기 스승을 또 다른 작가로 거론하기도 한다. 다만 이는 쓰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독서를 통해 생각이 싹트고 통찰력이 덧대어진 그 결과물일 따름이다.


또한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어떤 행동이나 경험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허위적이다. 글쓰기를 전제한 모든 경험은 허위와 다름 아니다.


내가 어떤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그러한 경험에 뛰어든다는 것은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를 미리 염두에 둔 것으로, 관객을 미리 상정하고 공연을 준비하는 연극처럼 자신을 증명하는 절실함보다는 치레와 같은 허위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작가들의 독자 눈치보기를 염려한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작가들에게 생계를 위한 다른 직업을 갖도록 권장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예술은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예술가는 자신이 발견한 자신만의 거울을 통해 바라본 세계의 단면을 한 폭의 캔버스 안에 반사시키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설령 시대를 앞서간 것일지라도 그리지 않고선 못 배기기 때문에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이 발견한 인간적 고뇌를 비밀스럽게 남겨 놓는다.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 갑자기 초대된 존재이다. 낮잠을 자고 있었던 사람을 흔들어 깨워 무대 위로 올려놓은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이자 역설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강압적이다. 삶은 우리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강압적이다.


기다려주지 않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증명을 요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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