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이동한 부서는 좌석이동제를 적용하고 있었다. 관리자급을 제외한 직원들이 부서마다 정해진 구역 안에서 매일 자리를 선택한다.
어제나 그제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지 못한다. 다만 사나흘이 지나면 가능하다.
직원마다 선호하는 자리가 다를 수도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편이지만 아침에 일찍 출근하는 순서대로 배정받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반복되는 일종의 규칙이 형성되어 있다. 13명의 부서원 중 나는 그나마 이른 시각에 출근하는 편이어서 보통의 경우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세 번째로 일찍 출근한 덕분에 선호하는 자리에 앉아 PC를 켜고 자리에서 소설 책 한 권을 읽고 있었다. 그랬더니 옆자리에 앉은 한 살 터울의 형님뻘 직원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을 건넨다.
"지금 읽는 책이야?"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처럼 눈으로 명확히 보이는 장면을 입으로 한 번 더 확고한 장면으로 그려놓는다. 붓 대신에 언어를 사용할 따름이다.
그러고 나서는 책에 빼곡히 붙여 놓은 플래그 띠지가 눈에 띄었는지 이건 무슨 의미이냐고 재차 물어온다. 나는 그저 제가 스스로 쓸 수 없는 명문장들을 표시해 둔 것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했다.
색깔별로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는 의혹을 감추지 못한 그는 별안간 손을 내밀었다. 보고 있던 책을 건네준 뒤 가만 보니 플래그를 붙인 어떤 문장을 눈썹을 찌푸린 채 읽고 있다.
"그냥 소설이 아니라 꽤 어려운 책인데?"
"아 그냥 소설이에요."
옆자리에 앉은 직원과 짧게 담소를 나누고선 곧바로 업무가 시작하기 전까지 소세키의 "산시로"를 따라 우에노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우에노 공원을 가로질러 어느 화가의 작업실에서 운명을 마주하고 있는 산시로의 뒤편에 앉아 그림을 감상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힘주어 걷는 걸음걸이가 바닥을 지그시 밟는 당찬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걸음이 임원실 바로 앞에서 멈추더니 문 밖에서 꾸벅 인사를 한다. 인사를 받은 임원은 곧이어 무슨무슨 자료를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그렇지 않아도 서쪽에서는 업무가 시작되기 한참 전인데도 부산스럽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사무실이 부산스러운 분위기가 부산 앞바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니 이곳이 과연 서울답다.
서쪽의 북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있던 찰나에 동쪽 임원실 앞에 서서 인사를 드리자마자 명령을 수명하는 젊은 친구의 널따란 등판을 곁눈질로 보고 있자니 딱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저렇게 씩씩하게 걷고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있다는 태도로 사무실의 동서남북을 활보하고 다녔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휙 스쳐 지나갔다. '아, 나도 한때는 저랬었는데. 허나 굳이 저래야만 하나.'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바라보면서 우에노공원이나 하얀 캔버스가 가득 들어찬 화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에 머리가 무거워졌다.
며칠 전 "매 순간, 나답게"라는 글귀를 보고 나서 생각이 많아졌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때 엘리베이터에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말이 떠올랐다.
예부터 아름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은 개인 또는 나를 뜻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름답다는 말은 자신답다는 뜻이다.
나다운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일 테다. 자신은 이성과 감정 그리고 영혼으로 구성된 자아의 겉모습이다.
자아는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자 목표를 지니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겠다는 것조차도 있는 그대로 자아의 지향점인 것이다.
오르테가가 일러준 것처럼 인간은 시각이라는 본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적 갈망을 소진한다. 마찬가지로 사무실에서 업무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부지런히 일을 하는 모습도 자아가 추구하는 자신의 단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과연 일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과도한 근면함이 결국 자신다운 것일까? 이 행위는 무엇을 증거하기 위한 움직임인가?
단편적으로 본다면 근면함이자 신의 성실성을 다하는 모습으로 비칠 테지만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삶의 주인인 자신을 삶에서 멀리 떨어뜨리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과 동일시하고 자신을 투영하는 일이라는 것의 속성상 영속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특히 헌신하고자 하는 일이 지금 당장 사라져도 이 지구상에 아무런 여파를 미치지 못한다면 어찌 그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말할 여지가 있을까?
바라보고 숨 쉬고 느끼는 시간들 사이사이에 인간은 자아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도록 움직인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라는 미명하에서라도 소극적이나마 우리는 오늘 힘을 보태 더 나은 내일을 완성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완성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는 일일까, 아니면 우리가 죽어도 변하지 않을 우리의 인격인 것인가?
인격이라는 숭고한 단어 앞에 절로 고개를 숙인다. 고상한 인간은 말이 없는 법이다.
업무시간을 초과해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인격에 부족함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은 대개 선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다만 개개인들로 하여금 인격형성의 기회를 박탈하고 타인의 욕망을 해소하도록 내몰고 있는 사회적 구조가 문제적일 따름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오늘 하루를 보내는가.
만일 사후세계가 있고 입장권이 바로 인격이라면, 죽음의 순간 있는 그대로의 인격을 사후세계의 위상과 걸맞게 하기 위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누군가는 자기계발조차도 타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과정일 따름이라며 탄식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지닌 기술조차도 일차적으로는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소진되곤 했다.
신념이 변하면 사람의 행동이 달라진다. 우리가 여태껏 인격수양보다는 자본주의가 심어 놓은 자아실현에 혈안이었던 것은 행동을 이끄는 욕망 때문에 현 체계가 가장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고 잘못된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과 직업의 차이를 분별할 줄 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내 얘기를 반길 것이다. 생계수단이 삶을 위협하지 않고 평생을 바쳐도 될 만한 업을 목적이자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그러한 품격을 갖추는 그런 시대가 도래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