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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May 25. 2023

바퀴벌레와 회계학 시험(1)


아침에 본부 연수를 듣고 온 팀장님이 자리에 앉자마자 꺅 소리를 질렀다. 비명소리에 놀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선 채로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팀장님?"


"아, 못 앉겠어요. 바퀴벌레가......"


"네? 잡았어요?"


"네. 잡긴 잡았는데......"


"그런데요?"


그 뒤로는 별로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듣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대답은 뻔했다. 바닥에 기어 다닌 벌레를 구둣발로 짓이겨 죽여놓았을 테니깐. 그 뒤처리는커녕 벌어진 그 일 자체가 일상적이지 않아 버거웠는지 여자 팀장님은 퇴근할 때까지 서서 버틸 태세였다. 하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누군들 좋아하겠나 싶었다.


결혼생활 중 벌레를 잡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다행히 결혼생활 중에 바퀴벌레를 잡은 적은 없었다. 대신에 그땐 모기가 문제였다.


전처는 모기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기만 해도 내게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강요했다. 의무가 강요될 땐 권리가 주장될 때보다 더 숙연해지곤 했다.


의무가 강요되는 일은 시간과 요일을 구별하지 않았다. 당시 맞벌이 부부였는데 자정이든 새벽 3시든 간에 모기 소리만 들리면 깊이 잠들어 있던 내 옆구리를 툭 치거나 앙칼진 목소리로 귀를 찔렀다.


두고두고 잔소리에 시달릴 바에는 지금 당장의 30분을 희생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모기 잡기 도사의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사실 결혼하기 전부터 나는 모기 잡기의 선수였다.


모든 기술의 발전에는 게으름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지 않던가. 창조의 세계에서 모방이 어머니인 것처럼, 게으름이 기술 혁신의 모친인 셈이다.  잠만큼 게으름의 표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 깊은 잠을, 더 편안한 잠을 추구하기 위해선 모기 잡는 기술을 스스로 연마할 수밖에 없었다.


모기는 언제나 자신의 표적 근처에 얼씬거리곤 했다. 그런데 하필 모기는 자신의 색과 비슷한 곳에 숨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특히나 자다 깬 상태에서는 침침한 시야 때문에 보호색을 띤 모기를 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필요가 기술을 연마하게 한다. 남은 시간이라도 숙면하고 싶은 욕구가 모기 잡는 기술을 숙련시켰다.


사실 특별히 기술이랄 것도 없다. 눈에 불을 켜고 귀를 열어 모기의 움직임과 소리를 포착하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쏟아지는 잠과의 사투, 모기와의 결투가 동시에 이뤄지는 한여름밤의 자연과의 싸움이었다. 자연과 대적하는 일은 늘 외롭고 고통스럽다.


총명(聰明), 귀 밝을 총, 눈 밝을 명 자이다. 예로부터 눈이 맑고 귀가 밝으면 좋은 머리에 대한 단서로 여겨졌었나 보다. 한자든 중국어든 그림 같이 생긴 이 문자체계는 언어를 의미로 표현했다.


한여름밤 어김없이 모기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구리가 시큰해졌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내 잠은 내가 자야 한다는 주의가 아니라면, 잠시 깨어 배우자의 숙면을 위한 희생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의 의무였다.


안방에는 나와 아내뿐만 아니라 우리의 귀염둥이 딸아이도 함께 자고 있었으니 가장의 어깨는 자고 있을 때에도 무거운 법이었다. 어쩐지 아침에 깰 때마다 어깨가 뻐근했다. 아내의 욕구가 법이 되어버리는 일은 가정에 있어서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혼인기간 때 습득한 벌레퇴치 기술은 이혼 후 더 이상 발휘할 일은 없었다. 아니, 없어 왔다.


지금 사는 집에는 모기가 별로 들어올 일이 없었고, 바퀴벌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안심할 순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켄타우로스도 현전하진 않지만, 시의 세계에서는 처녀를 한쪽 어깨에 짊어매고 들판을 달리고 있다.


사각티슈 몇 장을 꺼내 한쪽 바닥에 던지고 있던 팀장님은 한숨을 그치지 않았다. 여자인 만큼 벌레를 보고 놀라고 질색하는 건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대신에 과거의 기억 때문에 멈칫멈칫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거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도 되죠?"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안타깝게 정답을 알고 있었다. 십수 년 전에 신문 기사에서 읽은 것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뇌리에 박혀 있었다. 


"아, 그냥 제가 버릴게요."라고 말해놓고 바닥에 깔린 사각티슈를 손으로 잡아 동그랗게 되도록 웅크렸는데 벌레의 사체를 잡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사체가 바닥에 여전히 남은 채 휴지만 들어 올렸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사체의 크기가 상당했다.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로 꽤 큰 녀석이었다.


아무리 벌레퇴출 기술이 숙련되었다고 해도 이른 오전부터 벌레를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법이었다. 그것이 인간적인 인지상정이다. 


사각티슈를 다시 몇 장 뽑고는 손으로 잘 모아 사체를 안전하게 주먹 속에 확보했다. 남자인 만큼 태연한 척하려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선 곧바로 흡연구역으로 이동해 재떨이에다가 휴지 한 움큼을 한 움큼인 채로 내려놓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로비층 화장실에서 손을 세 번쯤 연달아 씻고 나서야 다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뒤로 계속 뭔가 찝찝했다. 상상 속의 작은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얼굴이고 목덜미고 간지러워지기 시작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에휴, 아침부터 벌레를 만졌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먼.'이라는 작은 탄식을 가슴 안에서 허공을 향해 내뱉었다. 


어깨죽지를 긁적거리고 있는데 여자 팀장님이 왼쪽으로 얼굴을 돌리더니 뭐라고 말을 했다.


"팀장님, 시험 언제 보실 거예요?"


"네? 무슨 시험이요?"


"연결회계 시험이요!"


이번엔 시험으로 나를 움직이게 만들 작정이었다. 아무튼 간에 부지런한 여자 팀장님은 언제나 나를 들쑤신다. 그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실적 부진 직원으로 내몰렸을지도 모른다. 이 점에 대해선 정말 감사할 마음밖에 없다.


하지만 드디어 올 게 온 것이었다. 그동안 시간의 흐름도 인지하지 못한 채 여태 무념무상 상태로 지내다가 드디어 도착한 전령의 사신이 급박한 말투로 '당신은 오늘 오후 6시까지 시험을 완료해야 한다'라고 두루마리 종이에 적힌 말을 외친 줄로만 알았다. 오히려 나는 화들짝 놀란 기색으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네? 오늘까지에요?"


"아니요. 오늘부터에요. 팀장님, 언제 시간 되세요?"


그랬다. 올초 인사고과에 포함되는 연수를 신청할 때 직원들이 이 과목은 쉽대, 그건 좀 별로래라면서 미리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같은 과목을 신청했었던 것이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팀장님하고만 얘기를 나누었고, 그분이 신청하는 것 중에 관심이 가는 두 과목은 똑같이 신청했었다. 그랬던 것이 벌써 3개월 전 일이었다. 3개월이 콸콸콸 흘러가더니 온라인 평가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어차피 온라인 평가였다. 2시간 안에 40문제를 풀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듣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120분 동안 40문제를 푸는 건 공무원 시험에 비하면 요즘 말로 혜자스러운 시험이었다. 그것도 오픈북이라니, 그저 대충 하기만 해도 과락은 면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토록 나는 안일한 사람이었다. 무슨 문제가 닥쳐오기 전까지는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십수 년 전부터 유행했던 MBTI 검사에 따르면 내 성격의 대표적 성향은 게으름이었다. 땅이 흔들리기 전까진 튼튼한 땅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않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아직까진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되자마자 나는 다시 또 게을러졌다. 게으른 틈새에서 난 여자 팀장님에게 되물었다.


"팀장님은 언제 보실 거예요?"


"글쎄요. 팀장님 되는 시간에 보면 어때요?"


이쯤 되면 궁지에 몰렸다고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내게 도움을 요청한 이상 모른 척할 순 없는 법이었다.


"이따가 마감하고 바로 해치우면 어떨까요?"


그제야 여자 팀장님은 눈가에 웃음을 띄우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안심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모니터로 얼굴을 돌렸는데 뒤이어 들려온 말에 나는 다시 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구 걸로 시험 볼 거예요?"


"네? 무슨 말씀이에요? 누구 거라니요?"


"아, 저희 사무실에서 이 시험을 봐야 할 직원이 총 8명이에요."


"네? 15명 중에 8명이나 같은 시험을 봐야 한다고요?"


"네. 모르셨어요? 그때 이 시험이 쉽다고 해서 다 같이 신청했잖아요?"


내가 그걸 알 리가 없다. 지난 7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연수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내가 들어야 할 연수조차 신경 쓰지 않았는데 타인이 무슨 연수를 듣는지 관심을 가질 리가 단연코 없다. 연수야 어차피 다들 각자 알아서들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무 걸로나 하시죠. 저는 상관없어요."라고 약간은 퉁명스럽게 들릴지도 모를 말투로 건성건성 답변했다. 내 앞에는 시험보다 더 급한 일들이 많았으니 회계학 시험은 어떻게든 될 거라며 시큰둥하게 말해도 될 거라고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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