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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May 11. 2023

테나르디에와 조우했다.

헨델이 필요한 일주일이었다.


최근 일주일간 매일같이 운동하고 매일같이 비슷한 열량의 식사량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체중이 감소했다. 건강검진 이후로 약 두 달간 비슷한 숫자를 표시하기만 했던 체중계에 예외적인 숫자가 나타난 요 며칠 사이에 스스로 심적 부담감의 경중에 대한 인식은 불가피한 속성을 띠고 있었다.

언젠가 스스로에게 타일렀던 것 중에 하나가 자베르를 만나고 싶어 할지언정 웬만하면 테나르디에와 맞붙는 일은 기필코 기피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생사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오직 내 마음뿐이지 않던가.

그토록 기피하고자 했던 테나르디에가 내 눈앞에 툭 튀어나오더니만 기어코 나를 휘잡고 늘어져 왜곡하고 기만하기 시작했다. 그 강도는 점점 더 강해져 그가 평균인 속으로 도망쳐 자신을 감추려는 순간 아득히 멀어진 그의 그림자에 시선을 던지고선 아연실색하며 무기력해졌다.

빅토르 위고의 안내를 따라 수개월간 문학적 감수성에 도취되어 있을 때 나는 무릎을 꿇고 축복을 빌었다. 제발 테나르디에만큼은 마주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마들렌이 되고 장발장으로 분해 테나르디에를 이겨내고 용서할 자신이 없다며 나의 무능력을 근거로 신께 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의 한복판에서 그 인간을 마주치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세네카가 말하지 않았던가. 신은 사랑하는 이에게 시련을, 그렇지 않은 이에겐 물질적 축복을 내린다고.

자신의 속된 이익을 위해 나를 추궁하던 테나르디에가 평균인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사라진 그림자의 자취를 놀란 시선으로 쫓으면서 나는 여전히 자신을 책망했다. 왜 하필이면 테나르디에인가. 차라리 자베르와 견주기를, 자베르와 힘겨루기를 했었어야 하지 않았는가.

나의 적이 평균인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속으로 도망친 뒤에는 언제나 그 뒤끝이 개운치 않게 끝나는 법이었다. 이러한 싸움에서 열세로 기울게 되는 건 비단 물질적인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손을 떠난 해결방법과 사후처리가 진행될 가까운 미래가 눈에 선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주변인으로 비켜서야만 한다는 것도 예감할 수 있었다.

이토록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던 상황 속에서 내겐 헨델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나는 헨델의 메시아를 통해 영혼의 경건을 위한 방어막을 구축해야만 했다.

속물 중에서도 속물이었던 테나르디에가 훔쳐간 어둠의 권세에 대항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신성함뿐이었을 테니깐.

인생의 역경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마다 나는 마치 조난자가 부표를 부둥켜안듯이 욥기를 부여잡은 채 표류하는 자신을 온전히 맡겼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것뿐이었으니깐.

하지만 40번을 읽었는데도 이 둔하디 둔한 머리로는 도저히 그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다. 똑같은 일을 40번이나 했는데도 찾고자 한 걸 발견하지 못해서 포기했다면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님에 틀림없다.

순백의 광채에 휩싸여 있던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금빛으로 빛나고 계신 그분의 영광을, 어두운 잿빛으로 엄중한 경고를 해주신 엄격한 인격의 그분 앞에 고개를 조아렸던 두 차례의 경험을 두고 나는 과연 그분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신실한 사람들을 좇아 질문을 던지고 사정을 호소했지만 그들이 내게 제시한 건 그저 신비주의라는 옷을 입은 신기루에 불과했다.

그러자 나는 스스로 길을 떠나 답을 찾기로 했다. 회의주의와 낙관주의 사이에서 외줄 타기 곡예를 해보기도 했으며,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빅뱅이론의 한계에 맞부딪히며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기도 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강력한 신념이, 아인슈타인이 죽기 직전까지 그토록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부정했던 비국소적 얽힘이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을 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아인슈타인의 결정론적 사상도 내게는 유효성을 상실하고 힘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또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신학에서 착안한 문학이 내건 깃발이 나를 향해 그 기치를 하늘 높이 흔들기 시작했다. 정상을 정복한 것처럼 보였던 문학의 길에 철학의 일부가 합세하기도 했다.

그 깃발 아래에서 절대자는 스스로 완벽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이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에게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절대자는 불완전한 존재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대자가 불완전자에게 손길을 뻗으면 절대자조차 불완전하게 되기 때문이란다. 완벽한 절대자가 빚어낸 피조물치고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도 형편없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란다.

신을 인격적으로 가정하는 것도 인간적인 신을 향한 인간적 염원의 소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러한 관점 전반에 대해 거리를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들의 관점도 결국 순전히 인간적이었을 뿐이었다. 다만 그들은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마치 자신은 객관성을 확보한 것처럼 굴었던 것뿐이었다. 객관성이라는 가면의 뒤에는 회의주의가 웅크리고 있었다.

블랙홀의 탄생 과정을 시간적으로 역순으로 돌리면 그게 바로 우주 탄생의 기원에 대한 단서라고 했던 스티븐 호킹 박사의 신박한 논리에 다시금 빠져들었다.

거대한 질량의 수소 원자가 스스로 헬륨으로 붕괴됨으로써 행성이 자멸하는 것을 t=0 시점인 최초 우주의 기원에 대입해 빅뱅이론이란 것을 주창했다. 그들은 스스로 붕괴하는 어떤 거대한 물질을 상정하고 스스로의 질량을 지탱하지 못해 대규모의 폭발을 일으켜 약 150억 년 전에 발생한 폭발이 현재까지 우주를 팽창시키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물리학자들의 해석은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탁월했다. 다만 "누가 과연 무슨 이유로", 다시 말해 주체와 당위성을 설명하지 못했다. 빅뱅이론에는 trigger가 부재했던 것이다.

그 어떤 이론도 순전히 인간적이었다. 모든 이론은 이토록 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인간이 가진 한계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의미를 추구했다.

오르테가가 말한 대로 나는 우주의 잔여물이 쏟아지고 있는 신비의 그림자가 가진 '의미'를 필요로 한다.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막다른 삼거리 앞에 서 있었다. 의미, 허무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제삼자적 상태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내가 찾는 것을 명확히 해야 했다. 난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학창 시절 대입시험을 앞둔 가을 하늘 아래 칠판이 아니라 저 멀리 운동장을 향해 시선을 던졌을 때 내가 찾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나는 우주의 잔여물이 쏟아지고 있는 신비의 그림자가 가진 의미, 바로 그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먼 훗날 내가 절대자 앞에 서 있게 될 때 내가 그분께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토록 시련과 고난을 겪도록 내버려 둔 것인가요?"는 아니다.

나는 그분께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이미 다 알고 계셨으면서, 당신이 이미 알고 계신 걸 알고 있는 미약한 존재인 저는 차마 불평도 하소연도 할 수 없게 만드셨으면서, 그걸 이미 알고 있으셨을 텐데도 꼭 굳이 그렇게 하셔야만 했었나요?"

내게 남은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여인을 위해 여생을 바치면서 나는 이 질문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나의 종착지를 향해 위대한 사소함을 추구할 것이다. 그게 바로 삶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글에 마침표를 찍기 전 이미 그분은 나를 꿰뚫어 보셨을 테니깐 그분과 관계를 맺는 동안 나는 살고자 하는 의지만큼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살고자 하는 의지만큼 살아가는 것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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