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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May 08. 2023

산문적인 인간을 위한 변명(5)

바람이 침묵했다.

바람이 침묵한 날이었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그것이 아니었다. 바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두 다리로 우두커니 선 상태에서 귀를 기울여야만 했던 것이었는데, 어제의 바람을 맞이할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대신에 하늘의 마음을 자신의 주름 사이사이에 모두 받아들인 계곡의 맑은 소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어제 만난 개울은 계곡이 아니었다는 점만 다를 뿐, 내 귓가에 맴돌던 시냇물 소리는 청명함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오늘도.


답답한 가슴을 품고 차에 몸을 실었을 때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어디세요? 잠깐 통화할 수 있나요?"라는 물음에 답답한 가슴을 안고 대범하게 연주대로 가려고 한다며 행선지를 밝혔더니 "역시나."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만큼 나는 뻔하디 뻔한 산문적인 인간이었다.


그저 산에 가는 중입니다라고 말해도 되었을 것을 굳이 변명을 덧붙이곤 했다. 그것도 볼멘소리로. 그건 내 마음이 관통해야 하는 어떤 어둠의 장막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바람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찾던, 그토록 찾던 바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바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과연 나는 도시인이 아니었고 자연인이라는 걸 가슴 깊이 느끼곤 했다. 그러한 생각이 마음을 녹이면 어느새 푸근해진 가슴은 생기를 되찾곤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닫는 데까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뜨거운 땀방울에 젖은 육체라는 물질의 상태가 잠시 빌려준 환각이라고만 여겼던 것이었다.


실제로는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미끄러져 내려가던 산속에서 갑자기 바람이 나를 붙잡아서야 비로소 나는 그러한 평온의 원인이 그것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었다. 바람에게 나는 큰 빚을 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몇 년 전엔가 대둔산에서 무리에 떨어진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던 큰 키의 나무의 무리를 하염없이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도 바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몇 년 전엔가 소백산에서 대설특보로 입산이 금지된 것도 모른 채 산속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하늘을 가득 채운 바람의 고함소리에 놀라 몇 번이고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를 기다리던 바람은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고함소리로 내게 외쳤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 알았던, 아니 오히려 항상 곁에 있어서 습관이라는 마취제에 취한 것처럼 내 곁을 지켜주고 있던 바람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곁에 있던 바람을 내 안에 소유하지 못했던, 내 안에 소유할 생각조차 못했던 나로서는 갈 길을 붙잡고 세운 바람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바람이 드디어 나를 붙잡아 세웠을 때 나는 굳이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그 바람이 내 눈앞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기다려도, 곁에 있었어도, 바라보지 못했던 그 바람을 산속에서, 망부석처럼 그 자리를 지키던 바람을 그제서야 만났다.


바람의 입김이 콧등을 스치고 지날 때 부끄러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람의 손길이 귓볼을 매만졌을 때 고개를 떨구었다.  뜨거운 눈물이 큼지막하게 멍울지더니 그대로 찰싹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돌바위로 파도치던 산길이 더 이상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서로 합쳐져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나를 찾던 바람을 내가 찾아 나선 오늘, 그 바람을 오늘 만나지 못했다. 큰 바람이 듬직한 나무와 손뼉을 치는 것처럼 큰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길래 바람인 줄 알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았다. 그러나 그건 또 하나의 물줄기가 쏜살같이 흐르는 소리에 불과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그 자리에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


바람 한점 없이 조용한 산속은 너무도 평온했다. 적막이 나를 감옥처럼 가둬 놓으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하릴없이 나는 발걸음을 띄었다.


한참을 걷다가 조잘조잘 시끄럽게 울어대는 계곡 물소리에 이끌려 갯가로 다가서 무릎을 꿇으며 허탈한 마음을 씻고는 나도 침묵을 지켰다.


바람이 올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아야 하며, 내가 다시 그 자리를 돌아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걸 한결같던 계곡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바람이 기다린 만큼, 이제 내가 기다려야 할 때라고.

바람은 그렇게 내게 기다림을 선물해 줬다.


꿈이 삶은 아니지만, 꿈이 삶을 확장시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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