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각형 May 07. 2023

산문적인 인간을 위한 변명(4)

관악산 둘레길 숲속에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 마음먹고 올라가기로 작정했다면 연주대까지 가는 일이 과한 목표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경험자에 한한 일이었을 터. 우리라는 소규모 공동체의 구성원은 각각 다양한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발길을 서두르게 되었으니 공동체 전체의 다양성은 각 개인의 다양성의 총합보다 크면 컸지 결코 작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기존의 계획을 무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 운명체는 안전과 평안이 더 소중한 가치이니깐.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길은 관악산 둘레길이었다.

십수 년 전에 부서에서 봄 야유회를 겸해서 북한산 둘레길로 전 부서원을 이끌고 행차를 다녀왔었는데, 그때가 둘레길을 걸어본 첫날이었다. 그 이후로는 제주도 올레 7길을 부슬비 아래에서 걸어가며 바닷바람과 수풀의 감미로운 향에 취해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순례길을 떠나기도 했었다. 관악산 둘레길은 초행길이었고, 둘레길 트래킹으로는 세 번째 방문이었다.

집합시간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던 빗줄기는 그나마 미스트처럼 미약하게 잦아들었지만 질퍽할지도 모를 산길을 스무 명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간다는 건 막상 걱정이 앞서게 될 만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연주대 등정이라는 등산과는 다르게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총총걸음으로 오르고 가벼운 날숨으로도 거침없이 내려갈 수 있는 능선길은 마음을 가볍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어제와 그제의 일기예보는 이상하리만큼 예상에서 빗나가기 일쑤였다. 등산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월요일 아침 주말 날씨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긴 터라 어렸을 때보다 일기예보의 정확성이 개선되었다는 점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보기 좋게 마음의 안정을 흔들어놓은 길게 이어진 비바람은 태양의 미소를 그리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누군들 비바람 속에서 산길을 걷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

그러한들 어떠하겠는가. 우리가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 되돌리기엔 우리가 떠나보낸 시간과 기대하던 부푼 가슴은 쉽게 진정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확한 연구는 적확한 발견에 의해 진정되는 것처럼, 기대에 부푼 가슴은 예정된 일정에 의해 진정되는 법이었다.

사당역 4번 출구에서 도보로 시작한 일행은 둘레길 초입인 관음사에서 잠시 멈춰 서서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 개인 장비 점검을 마치고 둥그랗게 모여 발 사진을 찍는 것으로 개선의 준비를 마쳤다.  관음사의 관문을 통과하고 둘레길을 안내하는 화살표와 주황색 리본을 쫓아가는 게임이 시작했다.

수풀이 우거진 산길은 인간이 들어섰어도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던 얼룩무늬 조릿대는 까르르 웃는 아이들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웃음소리 대신에 서로의 몸을 비벼대는 가볍디 가벼운 몸짓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집안에 온기가 돌아 시름에 사로잡힌 어른들의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우뚝 선 수목들은 그들의 우듬지에서부터 온몸의 이파리를 파르르 떨며 살랑이는 손짓을 대신했다.

얼마 전부터 숲이나 산속에서 귓가를 스치는 바람과의 대화가 사무치게 가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두를 맡은 임무를 등에 짊어지고 앞서가는 길 위에서 습기를 품어 부드러워진 바람이 나를 통과할 때면 드디어 숲속의 집안에 발을 들여놓은 내가 그들에게서 온몸으로 환영받는 느낌에 빠져들곤 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일지라도 낮은 기온에 의해 곧잘 몸을 움직이느라 더워진 훈기를 훔쳐가주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바람은 왜 이제야 찾아온 거냐고 부드러운 말투로 혼내주는 따듯한 마음의 여인을 눈앞에 그려놓았다.

작년 가을 이후로 오랫동안 침묵하던 개울은 하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모조리 받아둔 탓인지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떠들썩하게 숲속에 울려 퍼지는 그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는 울창한 숲을 지키고 있는 온갖 초록동무들의 보살핌 아래에 숲 밖으로는 한치도 벗어나지 않게, 차가운 도시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숨죽여 숨을 필요 없이 숨겨주는 거룩한 보호라는 은혜를 받고 있었다. 이뿐이랴? 덜컹거리는 기계들의 미어터질 듯한 소음을 온몸으로 막아 숲속의 고요함을 자신들의 보물에 한치의 흠도 내지 못하도록 했다. 개울을 소리 없이 숨겨준 수목에 대한 보답으로 시냇물은 장승처럼 지키고 선 수목들의 목을 한사코 마르지 않게 해 주었으리라.

상수리나무와 느티나무 등등 다양한 수목이 빼곡히 들어선 숲에는 태양의 미소를 보기가 어려웠을 테지만 어제는 특별히 더 온화한 미소를 그리워할 만했다. 비구름이 걷힌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이었다면 분명 화살처럼 황토 위로 쏟아지는 햇살의 한줄기 아래 눈을 치켜뜨고선 날카로운 미소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그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에 정신을 잃고 숲속을 어느새 두 시간이나 걸었다. 눈앞에는 무뚝뚝한 기계문명의 거인들이 거뭇거뭇 죽어있는 돌길 위로 투덜대며 지나치고 있었다.

휙휙 지나가는 거인들을 보고 있던 그때였다. 등 뒤 숲속쪽으로 부는 바람이 나의 두 볼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지나갔다. 그 바람을 타고 청초한 파랑새가 날개를 바람에 의탁하며 우아한 몸짓으로 자신을 감싼 채 마치 힘 하나 들이지 않는 것처럼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건 내게 하나의 손짓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직업에 관한 직장인의 변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