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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pr 25. 2023

직업에 관한 직장인의 변명

어찌나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지 주사 맞은 날을 기념해 글을 쓸 정도이다. 이쯤 되면 호주에서는 너무 한가한 일상 때문에 시답잖은 일들이 신문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수년 전 시드니의 하버 브리지 위에서 죽마고우가 너스레를 떨었을 때 비소와 실소 사이에서 서성이던 내가 스스로 부끄러워질 정도이다.



그 녀석이 한국땅을 떠난 지도 벌써 17년이 지나고 있으니 세월이 기억을 갉아먹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새삼스럽게 이런 일이 감사하다니 오늘의 하루가 유독 홀로서기의 정점에 이르렀다는 하나의 방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삶에서 몇 가지의 큰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보통 혼자였던 나는 오늘의 하루도 한 치의 머뭇거림조차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 녀석이 오늘같이 스산한 날 아침부터 나를 따라나섰다면 그보다 즐거운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우린 학창 시절부터 언제나 함께였으니.  



2022년 1월 6일 코로나 백신 3차 접종을 마치고 1년이 넘게 나는 무사했다. 이런 일이 원래는 감격스러울 만한 일은 아닐 테지만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던 날, 어느새 어둠이 조용히 찾아오는 이 순간에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가져다준다.



4번이나 되는 백신 접종의 날을 고스란히 기억 속에 담아 두고 있다. 매년 접종하는 독감백신을 접종한 날은 기억 속에 흔적조차 없는 것에 비하면, 코로나라는 질병의 무게가 상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경과로 본다면 네 번째 접종이 다른 세 번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오늘 맞은 백신은 2가 백신으로 기존의 것과는 그 성질이 분명 달랐다.



예방접종을 하기 전 나의 신체적 상황에 관해 초진 하던 의사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표정을 가득 담고선 가볍지만 따듯한 말투로 접종 후 찾아오는 부작용에 대해 안내를 해주었다. 여성 의사라 그런지 아니면 젊은 의사라서 그런지 다른 병원보다 훨씬 친절하고 상냥하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진료실에 들어서기 전 문에 붙어 있던 의사의 학력이 오늘따라 눈에 띄었다. 맨 위에 쓰여 있던 학위 때문이었는데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게 아닌 의학전문대학원이라는 단어였다.



'아, 3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면 이 정도의 직업은 가질 수 있겠구나.'



물론 그녀의 말투 때문에 얻게 된 인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의 말투는 진료실에 들어선 뒤 의자에 앉아 들을 수 있었고, 의학전문대학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문을 열면서 사선으로 스쳐 지나간 A4용지 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나이가 40대 중반에 이르자 여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달라졌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직업에 관한 관점이었다.



그동안 나는 직업이 없었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직업이 없었다는 뜻이다. 어디서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분명히 이런 말을 내 기억 속에 주입시켰다.



직장은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장소에 불과하고, 직업은 평생에 걸쳐 완성해 가는, 인생을 걸어도 될 만한 자신만의 일이라고.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지금까지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만약 경제적 부가가치의 생산이라는 조건이 직업에 대한 엄밀한 정의에 포함되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내게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저 글을 읽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나마 나의 행위 중 수년 전부터 시작한 글 읽기야 말로 평생에 걸쳐 완성해 가는 직업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부가적으로 글쓰기가 내 손에 달라붙기를 간절히 바라는 정도이다. 만약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에 눈 뜨게 될 정도로 재능을 발전시켜 성장할 수 있다면 아마도 묘비명에 이런 말을 새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르테가가 말한 '삶의 의미가 충만한 인생을 스스로 살다가 갈 길을 떠난 사람'이라고.



삶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니던가? 자신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곧 삶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하늘의 축복을 받아 운이 좋게도 작가로서의 삶을 살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묘비명을 세우는 건 사치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접종 후 3시간이 지나자 슬슬 몸에서 약물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하얼빈에 묻히고자 했던 안중근의 유지를 눈물겹게 읽고 있던 찰나에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고개를 받치고 있던 경추에서 부담을 느끼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이 멀지 않아 체온을 재가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문장도 점차 쉬워져 갔고, 행간의 간격도 점차 여유로워지는 장면도 많아 독서에 속도를 붙이기가 한결 수월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덮었다. 그동안 집중한 터라 느끼지 못했는지 노곤함이 순식간에 내 위로 덮쳐왔다. 함께 있던 아이에게 잠시 잠을 청하겠다고 말한 뒤 침대에 몸을 의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부산한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나를 부르길래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아이였다. 이미 어둑해진 저녁 어스름이 집안까지 파고들어 방구석구석 어둠에 눌려 있었다.



낮잠은 너무 오래 자면 안 된다고 말하던 아빠의 잔소리를, '너무 오래 잤어, 아빠'라는 귀여운 말투로 딸아이가 내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나를 챙겨줄 때마다 아이가 성장한 느낌이 들곤 했다.



눈을 뜨고 거실로 나와 물을 한잔 마셨다.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봤자 해가 저문 지 오래되어 눈에 보이는 건 별로 없었다.



어둠의 장막이 내려오자 시선의 방해가 사라지면서 생각은 이내 상념으로 빠져들었다. 만약 세 식구가 함께였다면  백신 접종 후 서로를 간호할 수 있도록 일정과 상황을 조율해 가면서 맞았겠구나, 딸아이와 단둘이 살아 지금까지 무사했지만 세 식구가 함께였다면 나도 한 번쯤은 코로나에 걸렸을까, 코로나로 인한 이 모든 과정을 세 식구가 함께했다면 우애가 더 돈독해졌을까. 멍한 시선은 어둠 속 한 구석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아이가 나를 현실로 다시 끌어당겼다. 



-아빠, 배고파.



-그래, 천천히 준비할게. 조금만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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