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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May 25. 2023

바퀴벌레와 회계학 시험(2)


"재현아, 약정서 서류 좀 준비해 줘. 나 이따가 1시엔 나가야 해."



"네, 차장님."



재현이는 나를 언제나 차장으로 부르곤 했다. 팀장이라는 직함은 어색해서 직급대로 불러주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는데 재현이는 유독 나를 차장으로 불러주었다. 그런 재현이에게 은근한 친근감과 허물없는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어제부터 준비하겠다던 서류가 내 손에 쥐어진 건 출발하기 5분 전쯤이었다. 서류 한 뭉치를 건네면서 승현이는 멋쩍다는 듯이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가야 하는데."


"에이, 아니야. 내가 다녀와도 돼."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 가지의 일을 처리할 때마다 사람들의 특징이 은연중에 드러나곤 하는데, 서류를 다룰 때 재현이의 특징은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되지 않게 하는 점이 있었다. 다시 말해 재현이는 서류를 정리하는 일에는 미숙한 모습을 보였고, 서류를 준비하는 일에는 느릿느릿했다. 다행히 10년이 넘게 일한 경력 덕분에 서류를 꼼꼼히 챙기긴 하지만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2년을 넘게 같이 일해본 바로는 거의 일정한 패턴을 보여주곤 했는데 이 정도면 습관이자 버릇이었다. 물론 재현이에게서 서류 정리 말고는 부족한 점을 찾기란 굉장히 어렵다.


나 역시도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 숫자나 기획과 관련된 일에 관해선 오른손잡이가 오른손으로 글을 쓰듯이 자연스럽게 접근이 가능했다. 그러나 복잡하게 쓴 규정을 찾는 일부터 규정을 적용하는 일에 있어선 다른 일에 비해 손에 일이 잡히는 속도가 더딘 편이다.


이건 내 능력 탓만은 아니었다. 회사의 규정이 꽤 복잡한데 반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어떤 일은 규정이 아니라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매뉴얼을 참조해야만 처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난잡한 체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규정을 채운 그 문장들이 모두 법조문의 형식을 본떠서 쓴 것으로 몇 번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곤 했다. 상대성이론이라든가 양자물리학, 형이상학에 관한 글은 술술 읽히는데도 규정은 도대체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는 준법지원부서의 자문이 필요한 일이 있었다. 준법지원부서의 답변을 읽는 동안 나는 머릿속이 수십 번은 꼬이는 통에 도무지 한 번만 읽고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번 정도 읽고 나서 감을 잡았는데, 세 번째엔 논리적 흐름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꼬이고 꼬인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살살 풀어보았다. 그랬더니 실상은 별것도 아닌 내용들이었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약정서도 그러했다. 약정서에 있는 조항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쉽게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쓸데없이 한 번 꼬아놓고 시작하더니 중간에 꼬인 것을 풀어줄 듯 말 듯하더니 그걸 내버려 두기는커녕 한 번 더 꼬아놓고 그 조항 끄트머리에서는 갑자기 뒤꽁무니를 감추고 내빼곤 했다. 


이러한 문장들을 볼 때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할 문장들을 이토록 기술적으로 어렵게 꼬아 놓은 문장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지성의 낭비와 번잡함 앞에서 무기력해지곤 했다. 


철학은 명증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명증하지 않은 철학은 아무리 심오한 뜻을 담지하고 있더라도 친절한 철학이 아니다. 친절하지 않은 철학은 배타적인 속성이 강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만약 법조문에도 철학이 담겨 있다고 그들이 주장한다면, 법조문도 명증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명증성이란 결국 불안에 떠는 존재가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법적 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쓸린 사람들을 위한 것이 법조문이라면 그들의 존재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법조문은 명증성을 담보해야만 한다.


문학은 적어도 클리셰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명증성과 다소간의 거리를 둘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문학의 특원일지도 모른다. 


또한 문학이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더더욱 명증성이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 겪은 경험을 매우 빼어난 눈길로 바라보면서 독창성을 창출해야 한다. 따라서 독창성을 위해서라면 명증성은 잠시 뒤로 물러나고 작가만의 시선을 반영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겪은 일화를 있는 그대로 줄줄이 이어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말해 독창성은 고유의 경험을 그대로 쓰는 데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만약 개인이 겪은 고유 경험을 있는 그대로 쓴다면 그건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서술이 아니라 기술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술에 그친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면 그건 잘 봐줘야 푸념 섞인 일기에 불과하다. 


과연 그 누가 자신의 일기장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길 원하겠는가?


시에 있어서도 우리가 참조할 위대한 시인이 있다. 릴케에 따르면 시에서는 반어법을 사용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겼다. 우주의 경이로운 순간을 발견하는 것이 시인의 몫이라면, 그는 결단코 반어법을 시에 적용해선 안 된다. 만약 반어법을 굳이 써야 한다면 그것도 아주 예외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반어법을 시에 쓰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 사상가이거나 정치인이다.


작가의 눈에서 나오는 독창성의 가치는 형식이라는 스타일, 스타일이라는 형식에서 나온다.  


정말 훌륭한 작품은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게 된다.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케빈에 대하여"에서 보여준 그것,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보여준 그것,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여준 그것들이다. 만약 내가 이러한 것들을 찾아낸다면 나는 하나의 작은 소망이자 꿈을 성취한 셈이 된다.


하지만 문명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분야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써야 한다. 복잡한 사고력으로 대변되는 지성은 복잡한 문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세계를 구상하고 그에 따른 문명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지성은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속성상 존재의 겉껍질 정도에 가깝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초기 소설가들의 독창성은 우리의 감동을 자아내는 장치 중 이미지가 유일하게 본질적인 요소여서 단지 실제 인물을 제거하는 단순한 작업만으로도 결정적인 완성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현대소설에서는 그러한 단순한 작업만으로는 독자에게 감동을 일으키게 할 수 없도록 위대한 작가들이 세련되게 세공해 놓았다. 프루스트 스스로도 그런 세공 작업에 동참했던 위인이었다.


법률가들의 문장, 내게 보내준 준법지원부의 조언은 아무리 뜯어봐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문장을 쓴 게 아니라 조립해 놓았다는 표현이 더 잘 맞을 정도였다. 


이토록 어지럽게 쓴 법률가들의 문장에는 탄생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법조문의 적용함에 있어 엄숙한 정신을 요구하는 숭고한 가치를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시원적 기초정신에도 불구하고 법조문의 이런 속성을 자본주의의 속성과 연결시켜 보면 상당한 유감을 표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알아야만 하는 전문지식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은 누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나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전문가들 중에서 회계사들은 숫자라는 명확한 기준이 있기 때문에 숫자를 이끌어낸 합리성에 대한 결벽증이 보다 더 강한 편이다. (물론 이 점이 회계사들로 하여금 다른 전문가적 집단에 비해 책임회피적 의견 표현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매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눈치를 본다.) 


얼핏 보면 틀린 숫자 같아도 합리적 추정에 의한 논리적 근거가 뒷받침된다면, 숫자를 의심한 사람이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그래서 숫자의 생산자와 이용자 간에 모종의 균형이 있다. 물론 그 숫자를 탄생시킨 논리적 근거가 궤변에 가까울 때도 있었다. 그때는 고개를 숙이고 사과해야만 한다.


서류를 챙기고 사무실을 막 나서려고 했을 때 2차 식사를 다녀온 직원들과 마주쳤다. 


"팀장님, 그 있잖아요. 팀장님이 테나르 어쩌고라고 했던 그 사람이 내일이 아니라 갑자기 오늘 온대요."


"아, 그래? 음, 어차피 나 지금 명동으로 외근 가야 해. 나 대신 잘 좀 부탁할게. 내가 저녁 살게."


"네, 팀장님, 방금 통화상으로는 그분 목소리가 들떠서 신나 있더라고요. 아마 별일 없을 것 같아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그래. 이따 보자."


어떤 문제 상황에 닥쳤을 때 그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여부가 삶을 완성하려고 노력하는 내게 주요한 관건이었다. 문제에 대한 부당함을 외부의 힘을 빌어 고발하고 해결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테나르디에라고 별명을 지어준 그 작자는 레미제라블의 여관집 주인이 환생한 것 같은, 니체가 저주를 퍼부었던 도덕적 비렁뱅이였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희생자인 것처럼 자신을 꾸미고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인간을 직접 마주 보게 된다면 직을 걸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럴 땐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손자병법에서도 서른여섯 번째 계는 줄행랑이었다. 줄행랑도 손무가 인정한 엄연한 병법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나는 명동으로 외근을 나간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테나르디에게서 벗어났다.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있었다. 별수 없이 계단으로 내려갔다. 3층 같은 2층에서 반쯤 내려가자 계단 위에 검은색 큰 점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니 천장을 향해 배를 까고 죽어버린 바퀴벌레였다. 그제야 박팀장님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들어오면서 "팀장님, 어제 이 건물에 약을 뿌렸나 봐요. 계단에서도 바퀴벌레 한 마리가 죽어 있더라고요."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집단생활을 하는 바퀴벌레가 홀로 계단 위에 죽어 있는 모습 위에 테나르디에가 쳐들어올 사무실을 떠나는 어깨가 축 쳐진 내 모습이 순간적으로 겹쳐졌다. 


무기력해진 마음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와 보니 하늘에서 화살처럼 날카롭게 내려 꽂힌 햇살이 바닥에 튕겨져 올라와 눈이 부셨다. 어디선가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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