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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May 29. 2023

바퀴벌레와 회계학 시험(3)

성숙, 도덕 그리고 사악한 도덕에 관하여


지하철에 올라탔다. 강남과 을지로라는 입지조건을 고려한다면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강남에서 2년여 시간 동안 경험적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사실 외근을 나가는 입장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속 편할 때가 많았다.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만 한다면 걱정할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하철로 삼성동에서 명동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어떤 방향을 선택하든지 지하철역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가는 데 걷는 시간이 비슷했다.


어떤 방향으로 갈지 잠깐 고민하다가 햇빛이 드는 방향이 좋을 거라는 생각에 종합운동장 방향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지하철이 문을 열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습관적으로 책을 꺼내 몇 문장을 눈으로 읽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직감할 수 있는 육체적 피로가 몰려왔다. 전날 회식의 여파가 주변에서 어른거리고 있었지만 그동안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느라 몰랐던 것이었다.


2호선으로 갈아탄 뒤에도 여전히 책을 눈앞에 펼쳐놓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뒷목으로 따스한 햇살의 손길이 느껴졌다. 대자연의 다정한 손길이 스쳐 지나자마자 눈이 스르르 감길 것만 같았다.


졸음을 참고 다시 몇 문장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오르테가의 목소리는 언제나 분명했다. 그래서 방향을 잃고 좌절하고 있을 때 항상 오르테가를 찾게 된다. 웅변적인 그의 목소리는 활자 안에서도 꿈틀거리며 살아 있었다.


지적으로 가장 세밀한 얘기를 할 때면 시인과 같은 문체로 그의 통찰을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에 감동하며 밤새 두 손을 모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의 지적인 스승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지만 오르테가 앞이라면 어린아이가 되어 칭얼거려도 그가 친히 지성의 축복을 내려 등 뒤에 두 개의 날개가 솟아날 것만 같았다.


오르테가에게서 받은 감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녀에게 삶을 바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베아트리체이자 나의 알베르틴인 그녀가 자신의 입술로 오르테가의 문장을 읊어준다면 그 어떤 유혹도 물리치고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시키리라.


그녀는 이럴 것이다. "이 문장 기억해요? 정말 멋있지 않아요? 아니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기가 막히지 않아요?" 이렇게 약간 흥분해 들뜬 목소리로 오르테가의 책을 여기저기 뒤지면서 자신이 감동했던 문장을 스스로 가리키며 내게 보여주려고 하는 그녀의 순박한 모습을 나는 조용하지만 행복한 눈길로 바라보리라.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마법의 36가지 질문 중에 "이 세상 사람 중에서 저녁 식사에 초대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려고 했다. 어차피 불가능을 터부시 하는 전제조건 아래에 저녁 식사 시간에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고르는 질문인 만큼 원하는 사람을 모두 고르자면 나는 오르테가와 나쓰메 소세키 그리고 프루스트를 그녀와 내가 직접 초대하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까지 내 인생의 팔 할은 오르테가와 프루스트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가 키워 준 셈이다. 지난 3년간 그들에게서 배운 것이 나머지 42년 동안 배운 것보다 훨씬 방대했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심오했다.


이렇게 한참을 오르테가를 감상하느라 지하철 몇 정거장을 지나쳤는데 어느 순간 점심시간에 직원들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팀장님,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어요. 이제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깐 민원도 풀어줄 거예요."


"아, 고생은 무슨. 네가 나 대신 일 처리하느라 고생했지, 뭐."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팀장님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니 참. 그런 사람은 분명히 성숙한 사람이 아니에요."


"하긴 그럴 거야."


그런데 이렇게 얘기가 일단락되는 줄 알았는데 마음속 한 구석에선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성숙이라고? 과연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 거야? 그런 모진 협박을 당했어도 그 사람과 직접 접촉해서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는 걸까? 거칠고 험한 사람들 때문에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내가 나섰어야 했던가?'


아마도 스스로 일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과 자책감, 그리고 그런 일의 발단이 되었던 어두운 패착이 내게 있었다고 스스로 감지했었으리라. 한동안 고심하던 나는 무심코 이렇게 반문해 버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성숙한 걸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해서 직원 중 그 누구도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사실 어떤 답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직원들의 침묵에 실망하지도 않았다.


지하철에 앉아 이 대화를 회상하고 있으니 스스로가 더 작게 여겨졌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성숙의 조건을 과연 나는 지켜냈던가? 


이처럼 사람들은 어떤 가치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데도 그 가치를 내걸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이 흔했다. 어떤 사람들은 추상적 가치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에 기대기보다는 사회적 통념에 의지하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사회적 자아에 자신을 맡긴 채 자신만의 사유를 통한 관념을 형성하지 못한 채 사회적 자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곤 한다. 그런 선택은 여러 모로 편리했다. 


군중심리에 기대는 것처럼 사회적 자아에 사유를 맡기면 안전한 기반이 되어주곤 했으니깐. 어떤 문제적 상황에 봉착했을 때에도 사회적 자아를 꺼내 들이밀기만 해도 자신은 천군만마처럼 든든한 지지기반 위에 서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리 또는 진실은 사회적 자아에게 맡겨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님에 틀림없다. 적어도 우리는 사회적 자아를 재사유함으로써 자신이 그것을 수용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관념을 형성할 수 있어야 했다.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니깐. 스스로 사유할 수 없다면 최소한 재사유는 해야만 한다.


도덕이라는 가치도 마찬가지이다. 도덕의 적은 부도덕이 아니라 사악한 도덕이다. 사악한 도덕은 모든 공리주의적 도덕으로써 매개적인 도덕의 교리이다. 보통 이러한 매개적인 도덕은 엄격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도덕적 교리가 엄격해질수록 도덕은 스스로가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공고한 기반을 잃게 된다.


과연 내 주변 사람 중에 성숙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부모님을 제외하고 가장 나이가 많은 본부장일까?


그는 박학다식한 사람이긴 했다. 특히 역사와 관련된 지식에 해박했다. 무슨 주제만 말하더라도 이런 사료 저런 사료를 줄줄이 꺼내곤 했다. 그러면서 꼭 말 끝에 자신은 국사로 박사학위로 받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본부장의 얘기를 잘 듣고 있다 보면 딱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19세기 프랑스 살롱에서 선풍적인 인기가 있었던 백과사전파의 인물들이었다. 


백과사전파 인물들의 특징은 아는 건 많았지만 그 지식들이 단편적으로 혼재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 지식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저 자신들의 기억력이 특출난 것을 자랑하기만 했다.


하지만 백번도 더 강조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진실한 역사적 현실은 자료나 사건이나 사물이 아니라 이러한 자료들이 녹아 서로 섞이어 이루어지는 진화라는 진실이었다.


너무도 뻔한 말인 구슬도 꿰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적 자료나 사건을 숱하게 꿰차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이 서로 녹아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역사적 진화를 보지 못한다면 그건 힘없이 말라죽은 지식이다. 백과사전파식 지식은 현실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어지러운 생각 끝에 결국 을지로에 도착했다. 을지로역에서 나와 목적지로 향했다. 4호선 명동역과 2호선 을지로입구역 사이 중간쯤에 있는 피부과였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면서 걸어간 끝에 화장품 가게처럼 생긴 어떤 매장 앞에서 멈춰 섰다. 피부과라면 분명 1층이 아니라 2층 이상에 병원을 냈을 텐데 주소에는 분명히 1층이라고 되어 있었고 1층은 한눈에 봐도 화장품 매장처럼 보였다.


 걸음 뒤로 물러서서 매장 간판을 봤더니 목적지가 맞았다. 유리로 된 자동문의 버튼을 눌러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구조가 굉장히 특이했다. 1층의 층고가 굉장히 높아서 1층이 2층 같은 1층이었다. 매장 안에는 나선형 모양의 좁은 계단이 있었고 한 사람이 겨우 올라가고 내려올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그리고 눈에 띄는 사람도 없었으며 인기척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매장 왼쪽 구석에 작은 엘리베이터가 눈에 띄었다.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고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피부과라면 분명 1층에 있지는 않을 테니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까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누군가가 내려왔다. 내가 만나야 할 병원장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그녀는 방문객이었던 나의 신분을 멀리서 짐작이라도 했는지 경계하는 기색 없이 나를 1.5층 한 구석으로 안내했다.


원장님은 벽을 기대고 앉았고 나는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자리를 잡고 나서 원장님이 잠시 서류를 챙기는 틈을 이용해 주변을 살폈더니 내가 앉은자리가 피부과를 찾아온 고객과 상담하는 자리였다.


순간적으로 이런 독특한 내부구조와 인테리어를 갖춘 피부과가 있다니 하면서 새삼스럽게 그녀의 남다른 안목과 개성에 감탄하게 되었다. 


"목감기가 심해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거예요. 코로나도 여태 안 걸렸는데 이상하게 목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말도 잘 안 나와요."


"아, 아닙니다. 지금 하시는 말씀 잘 들립니다. 그런데 코로나에 여태 안 걸리셨다고요?"


"네. 그런데 감기에......."


"아, 저도 아직 코로나에 안 걸렸어요. 코로나에 안 걸린 사람을 본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불편하시면 마스크를 벗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원장님 병원이니깐요."


"아, 아니에요. 옮길 수도 있어요. 쓰고 있는 편이 나아요."


전화로 통화했을 때와는 달리 실제 만났을 때 원장님은 굉장히 털털했다. 전화 통화 시 까다로울 줄로만 알았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면 이런 식으로 털털한 경우가 많았다. 


선제적 경험에 의해 마음이 약간 놓였다. 원장님에게서 받아야 할 서명을 약정서에 일일이 쓰게 하고 있었는데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저, 그것도 해결해주셔야 하는데요. 들으셨죠? 그...... 그나저나 그분 직책이 뭐예요?"


"아, 혹시 저희 본부장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본부장님이세요? 본부장님께 제가 또 부탁한 게 있어요. 들으셨어요?"


"네, 들었습니다. 제가 검토했습니다만, 그 부분은 원장님 개인 명의로는 조금 힘듭니다. 어떤 규제가 있는데요. 그 부분 때문에 힘듭니다."


"그래요? 아휴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해결하기 힘들 거라는 얘기를 했을 때 예의 그 까칠한 목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무 털털한 모습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기분이 가벼워진 나머지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어느새 대화의 주제가 원장님이 다양하게 벌이고 있는 사업에 대한 얘기까지 이어졌다. 


결국 해결하길 원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올해 소득 신고를 어느 정도 이상은 하셔야 한다고 귀띔까지 해주었다. 그제서 원장님의 눈빛에 한줄기 희망이 감돌았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모든 서류에 서명을 마치고 난 뒤 가방에 서류를 챙기고 나선형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원장님도 나를 따라 1층까지 내려왔다.


"점심을 드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오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금방 먹어요."


"네, 그럼 저는 이만."


"네, 조심히 가세요."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길거리로 나온 나는 다시 또 사무실로 돌아갈 길을 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게 왜인지 모르게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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