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각형 Jun 17. 2023

어쩐지 어제 하얀색 셔츠를 다리고 싶더라(2)

외조부의 위로



장례식장 로비에 들어섰다. 전국 각지에 있는 장례식장에 등급을 매기자면 서울ㅇㅅ병원 장례식장의 광활한 로비는 거의 오성급 호텔에 가까웠다. 서울 대형병원의 장례식장 로비는 보통 좁아터진 입구로 수많은 인파가 서로의 어깨를 간신히 피해 가는 정도였으니, 그에 비하면 이곳은 운동장처럼 널찍했다.


로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점심시간부터 쭉 조문객을 맞이했던 박팀장님이 홀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나는 재빠른 눈치로 박팀장님의 그림자 너머로 본부장님을 찾아보았으나 그의 인적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길을 알아차렸는지 박팀장님께서는 본부장님의 행적을 귀띔으로 알려주셨다. 귀한 조문객이 오셨다면서 2층 장례식장으로 올라가셨단다.


박팀장님의 말씀을 듣고 과연 언제쯤 서명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도 언젠간 틈을 타서 받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장례식장으로 올라가 어색한 태도로 방명록에 이름을 쓴 뒤 신발을 벗으려고 보니 이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신발들이 수십 켤레였다. 정승 집 개에 비유했던 옛말과 달리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조문객들이 꽤 많았다.


아무래도 가업을 승계한 상주들에게 조문 인사를 드림으로써 기존의 거래 관계라든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필요와 살아생전에 고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아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찾아온 조문객들이었으리라.


한참 가업을 일구고 급성장하던 당시의 상황은 아는 바가 없었지만 내가 직접 대면했던 고인은 너그러운 분이었다. 나는 고인 덕분에 모르던 세계를 몇 가지쯤 알게 되었었다.


100ml에 150만 원이나 호가하는 100년 된 식초가 존재한다는 것을, 750ml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의 맛을 알게 된 것도 모두 고인의 후덕한 마음 덕분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고인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편의점에서 천 원짜리 음료수를 사 먹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비교를 하다 보면 끝이 없어진다. 대신에 우리네 서민들의 삶도 과거 조선시대의 사회 평균과 비교해 봄으로써 현재 우리들의 상황을 애써 달래줄 수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조선왕조 중 천하의 귀하고 귀한 산해진미를 맛본 왕이 있다고 해도 21세기의 우리들보다 더 다양한 음식과 그 맛을 경험해보진 못했을 테니깐.


시대를 타고나는 것도 한 인간으로서 보면 하나의 복이기도 했다. 한국경제의 태동기 때 젊음의 열정으로 가업을 일구고 막강한 재력을 쌓은 고인에게 주어진 운명이 향유할 수 있도록 허락한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고인과 상주분들께 무거운 묵례를 드리고 조문객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문객들의 평균 연령이 생각보다 높았다.


그리고 벽에 달린 두 개의 TV 화면을 통해 고인의 사진이 하나의 자서전처럼 연대기를 이루면서 상영되고 있었다. 북적북적한 상갓집 내부와 화려한 영광으로 채색된 TV 화면을 보면서 나의 마지막 날을 유추해 보았다.


텅텅 빈 조문실은 살아생전 사회에 펼친 나의 미약한 영향력 탓이라고 해도, 딸아이 혼자서 상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안구에 습기가 찬 내 모습을 아마 상주분 중의 누군가가 봤다면 조용했던 상갓집이 갑작스럽게 비탄의 감정이 파도치는 곳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내 눈물이 글썽이던 눈가가 마르기 시작했다.


40이 넘어가면서부터 후배들이 치고 올라는 직장 환경에 노출되자 나는 끝에서 바라보는 연습에 몰두하곤 했다. 일명, 끝에서 바라보기.


끝에서 바라본다면 지금 겪고 있는 모진 풍파조차도 기억에 남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끝에서 바라볼 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가리라.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 그리고 내가 이 땅에 유일하게 남기고 가는 나의 반쪽인 딸아이. 학창 시절 기쁨과 좌절을 함께 나눈 친구.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삶의 고비마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던 사람들.


이렇게 일일이 명단을 떠올려보니 과연 직장과 관련된 사람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역시 직장은 그저 생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삶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현명한 일이다.


300년 전 시민혁명의 쾌거라는 기쁨에 취한 나머지 멍한 시선으로 부르주아들의 얄팍한 수에 놀아나지만 않았더라면, 자본주의만 아니었더라면, 자본주의가 아니라 정신주의였더라면 지금의 삶이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중압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시 마르크스의 날카로운 통찰처럼 지배관념은 지배계급의 관념일 뿐이었다.


조문을 마치고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특이한 것은 21세기인데도 불구하고 남직원과 여직원이 유별하여 다른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먹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토록 우리들 관념에 조선시대의 전통이 아직까지 유령처럼 남아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쳐왔다.


남자 측 테이블에는 고인을 끝까지 모신 임원분께서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젯밤부터 한숨도 잠들지 못해 평소보다 퀭한 눈가가 그의 피로뿐만 아니라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놓는 것만 같았다.


그는 평소 고인의 가족보다 고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자그마치 20년을 동거동락하는 사이처럼 가깝게 지내셨다고. 그만큼 고인을 향한 그리움이 저만치 흘러가버린 세월에 대한 야속함과 함께 얽히고설켜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몰아쳐 그 임원분을 양가적 감정의 가장자리로 몰아세우고 있으리라.


고인이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심복이었던 만큼 그 임원분께서는 고인과 만나게 된 그 첫날부터 마지막 순간까지의 일을 주마등에 올라선 것처럼 감상적인 목소리로 느리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 임원분께서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2003년을 23년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으나 우리들은 그걸 기똥차게 2003년으로 번역해서 듣고 있었다.


그러고선 몇 마디 말씀을 더 하시고선 이내 지쳤는지 물 한잔을 드시고 일어나 다른 조문객을 맞으러 떠나셨다. 이제 우리끼리 앉게 되어 긴장감을 다소 늦출 수 있게 되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박 부장님께서는 부자들의 말년에 대해서 궁금하신 점을 참지 못했다.


"이렇게 막대한 부를 쌓아놓았지만 다 놓고 가시네. 이런 분들의 말년은 과연 어떨까?"


박 부장님은 호기심이 가득하다기보다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보셨다.


"부자들은 말년에 다다를수록 허무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많대요. 그런데 OOO 회장님께선 선행을 많이 베푸셨다고 들었어요."


"아, 그래. 그랬구나."


"사실..."이라고 운을 띄운 뒤 나는 뒷말을 머뭇거렸다. 그러고선 박 부장님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뭐? 말해 봐."


"아, 그게 사실 철학과 종교에 관한 얘기인데요. 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 이후 종교의 심장에 비수를 하나 더 꽂았어요. 실존주의에서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했어요. 이 말은 결국 신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에요. 자신의 뜻대로 산다는 건 어찌 보면 좋은 얘기 같긴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결과적으로 허무주의로 빠지기 쉬워요. 반대로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그 끝 뒤에 내세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질 염려가 비신앙인들보다는 적어요. "


여기까지 나의 설명을 유심히 듣던 박 부장님께서도 내심 깊은 속내를 꺼내셨다. 박 부장님의 조심스러운 모습에서 그간 마음속으로 삭이고 있던 말이었구나를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내세가 있다고 믿어. 그래서 그 뒤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허무하지 않아."


이 말을 마치고선 스스로가 생각해도 겸언쩍었는지 박 부장님께선 내 등 뒤에 설치된 TV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셨다. 화면에 고인의 출생 연도가 나오자마자 입으로 혼자 중얼거리듯이 그 숫자를 그대로 읊었다. 나는 출생연도를 듣자마자 고인이 향유한 고인만의 시간을 계산해 냈다.


함께 있던 박 부장님과 재현이도 동시에 몇 해를 살다 가셨는지 어림셈을 하려고 입으로 중얼거렸다. 박 부장님은 고인의 출생연도를 말하면서 춘추가 얼마냐고 물어보셨다.


"향년 86세이십니다."


"아, 그래. 그러면 요새 분위기로 보면..."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 나는 고인께서 살아계셨을 때 직접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고인의 2년 전 생신날이었다.


비싼 술을 고급스러운 글라스에 따라주시면서 나눈 덕담 중에 우리 회사와 더불어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의 파고를 넘기셨던 지난 세월의 소회를 먼산 바라보듯이 나눠주셨다. 이어서 그분께선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님께서 각자 몇십 년의 수명을 누리셨는지 말씀하시고선 그 두 개의 숫자를 범주로 정해 자신의 생을 짐작하셨다.


오늘이 바로 그 숫자 범위에 있던 기간 중 하루였던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고인께서는 스스로 알고 계셨던 것처럼 느껴졌다.


오르테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의지만큼 살아가는 거라고.


3년 전 자신의 첫 손주였던 내게 가장 많은 사랑을 전해주셨던 외조부께서도 90세를 훌쩍 넘기셨지만 고령의 폐렴환자치고는 비교적 건강한 상태로 자신의 걸음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었다. 입원 당일 혹시라도 호흡곤란이 찾아올까 싶어 의사의 배려 차원에서 산소호흡기를 씌워드리려고 했을 때 외조부께서는 "저도 이제 하늘나라에 있는 아내를 만나러 가도 되겠죠?"라는 말을 간호사에게 건네셨다고 한다.


나의 외조모께서도 같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으셨지만 몇 년을 버티시지 못하고 그만 영면에 들으셨었다. 외조부께서도 하늘나라에 있는 자신의 평생 신부를 만나러 가도 되겠냐는 그 말씀을 남기시고 3일 뒤에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


60년 동안 종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셨던 외조부께서도 환갑이 지나 신앙을 갖게 되셨고, 마지막 순간에는 내세를 염두에 두셨다는 말씀을 듣고 나서 나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 외조부의 마지막 유언이나 마찬가지였던 내세에 대한 희망 그리고 믿음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의 오만함이 부끄러운 나머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3년 전 그렇게 나는, 묵묵히 상주석에 앉아 가슴속에서 무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어쩐지 어제 하얀색 셔츠를 다리고 싶더니만(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