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각형 Jun 28. 2023

확신이라는 감옥



저녁을 먹고 설거지까지 해치운 다음 나는 어김없이 거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눕는다. 그러고선 무릎을 들어 종아리를 핀 상태로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차례다.

어떤 신호를 기다릴 틈도 없이 상체를 그대로 들어 올리고 다리를 쭉 뻗자마자 배꼽 부근에 자극이 가도록 힘을 준다. 옆에서 보면 영락없이 뒤집어 놓은 "ㅅ"자가 되어버린다. 호흡을 내쉬면서 삼십까지 숫자를 세고 다시 들이마시면서 똑같이 삼십까지다.

이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하면 한 세트의 코어 운동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 네 세트를 더 하게 되면 하나의 운동이 완성된다.

집에서 혼자 이렇게 시작하는 운동은 푸시업과 브리지 그리고 어깨 운동을 거치게 되어 있다. 횟수는 많게는 오백 번 적게는 칠십 번을 종목마다 반복하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혼자만의 시간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푸시업을 백여 번 하고 심장 박동을 진정시키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더니 바깥이 온통 안개가 자욱한 것처럼 뿌옜다. 뿌연 하늘을 보면서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저녁을 먹을 때 습관적으로 네이버 앱을 열어 현재의 날씨를 확인했었다. 헤르만 헤세의 영향을 받아 신문이나 뉴스를 보지 않게 된 지 십 년 가까이 되었지만 날씨 예보는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할 수밖에 없었다.

"어라? 아까까지만 해도 별로 이상할 게 없었는데. 내가 잘못 본 건가?"

이런 의심이 들자마자 나는 다시 네이버 앱을 열어 지역 날씨를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뿌연 하늘은 미세먼지의 농도가 높다는 사실을 빨간색 글씨로 "나쁨"이라고 지역 날씨의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몇십 분 전만 하더라도 분명히 핸드폰으로 날씨를 확인했고, 확인했을 당시 특이한 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다시 그때의 기억을 되새겨본 결과 나는 습관이 주는 맹목적 행동의 결과를 알아차리게 되었고 그 순간 놀라고 말았다.

다시 말해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본 결과 빨간색 글씨가 당연히 없을 거라고 전제한 뒤 화면을 아래로 내려 주간 예보를 확인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렇게 맹목적은 행동을 하게 된 데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대기질이 매우 좋았고 현재의 상황을 가장 가까운 과거에 의존해 유추하는 습관적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지역 날씨 상으로 우리 집 주변의 대기질은 창문을 열어놓아선 안 될 정도로 미세먼지 농도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빨간색 글씨의 "나쁨"이라는 단어의 존재를 외면해 버린 나는 습관이라는 맹목적 행동에 따라 안심하고선 언제 비가 내리는지만 살펴보았던 것이었다.

그 전날만 해도 아무런 부담 없이 산행에 나설 만큼 미세먼지 농도는 아주 좋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날에도 당연히 문제가 없을 줄 확신했던 것이었다. 그만큼 확신이라는 건 상당히 위험한 속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물을 사유로 소유할 수 있다. 정신과 사물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우리 안에 깊숙이 내재된 관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관념을 통해 사물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관념이라는 망루에 앉아 사물을 보고, 사물의 집합인 세계를 바라본다.

어떤 한 사람이 확신이라는 관념에 가득 찬 나머지 공고한 성탑 안에 가만히 앉아 세계를 바라보게 되면 그는 감옥에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날의 내가 바로 확신이라는 감옥에 투옥된 죄인이었다. 식탁에 앉았을 때 빨간색 글씨의 "나쁨"을 눈여겨볼 수 있도록 세계를 바라보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는 하던 운동을 멈추고 부리나케 베란다 문을 닫고 공기청정기 두 대 모두 가동하는 동안 죄책감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확신이 견고해지면 견고해질수록 의심도 그만큼 많아진다. 확신이 나의 한계, 나의 경계선을 그었다.

확신이 이러한 성질을 가진 만큼 나의 한계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며 발버둥을 치지 않는다면 나의 삶은 편협함에 빠질 것이다. 내 삶을 돌이켜 보면 가장 크게 실패했을 때가 바로 가장 큰 확신에 빠져 있었을 때였다.

오르테가에 따르면 인간은 더 살고자 갈망하는 의지에 비례해서 사는 법이라고 했다. 내가 살아온 삶에서도 더 잘 되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에 비례해 성장했다.

돌이켜 보면 일상의 한계 속에 안주하거나 나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던 아집과 나태는 그것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던지 삶의 역동적인 추진력이 약해졌다는 방증이었으며, 그때 내 삶의 의지는 그 기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나의 한계는 늘 생리적인 속성에 의해 경계선이 그어졌고 동시에 내 일상을 떠받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산에서 뛰어다니면서 육체적 한계를 확장하고 그 확장된 감각을 충분히 향유했을 때 나는 심장의 박동 수에 맞춰 나의 한계가 탄력적으로 파도치곤 했었다.

반면 겨울에 잠시 산을 타는 일을 접는 동안에는 나의 신체적 한계가 굳어져 생명력이 약해졌고 신체적 퇴화기에 접어들기 시작했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무더위가 온 땅을 뒤덮든, 가을의 화려한 색이 산을 채색하든지 쉴 새 없이 주말마다 쉬는 날마다 산속을 비집고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산속을 뛰어다니던 나는 언제나 겨울을 앞두고 눈꽃산행을 계획하고 다짐하곤 했지만 너무 거창했던 계획은 매섭고 혹독했던 겨울바람 앞에서 무너지곤 했었다.

겨울산 앞에 서 있었던 과거의 나는 다른 계절과 다르게 더 참혹하곤 했으니깐.

그러나 다가오는 겨울에는 지난날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확신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확신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들어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지 늘 조심스럽다. 플라톤은 성찰하지 않는 삶을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을 알기 위해 늘 노력한다.

알제의 감옥에서 탈출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의 탈옥을 도와준 레판토의 외팔이에게 이 글을 바친다.

작가의 이전글 어쩐지 어제 하얀색 셔츠를 다리고 싶더라(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