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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ug 25. 2023

최은영, 밝은 밤



최은영, 밝은 밤

해가 지고 어둠이 들어선 밤을 밝다고 말했다면, 그 밤은 분명 달빛이 밝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로지 희미한 달빛에 의지한 채 밤길을 걷는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저절로 하게 되는 본능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달빛이 밝다고 해도 어두컴컴한 밤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의 발 앞뿐입니다.

멀리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밤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모습과 너무도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기피하는지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격에 따라 분명히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호오라는 감정은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지속하지도 않습니다.

감정을 해소하는 방법은 그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성숙의 필요충분적 조건에 가까워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정에 취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모든 감정을 경험해 본 사람일지라도, 그래서 더이상 새롭게 느껴볼 감정이 남아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조차도 감정에 의해 농락되는 일을 마음대로 피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삶이라는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겪게 되는 수많은 일을 통해 우리는 선제적으로 또는 사후적으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이라는 불투명한 달빛에 의존한 채 깜깜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억입니다.

기억이 분명할수록 자신의 삶은 부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천부적인 기억력을 통해 삶을 자신의 마음속에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모든 순간을 다 기록할 순 없겠지만, 중요한 순간을 모조리 기억 속에 기록해 둠으로써 그는 자신의 삶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운이 좋아 글쓰기 재능을 타고난 일부 사람들은 책이라는 사물로 자신의 삶에 형식으로 부여함으로써 필멸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억의 도구로 비단 거창하게 소설이라는 작업만 있는 것은 압니다.

서민적 글쓰기인 편지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서민적 미술작업인 사진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밝은 밤"이라는 소설의 줄거리를 이어나가는 가장 주요한 두 가지 사물을 꼽는다면 단연 편지와 사진일 것입니다.

편지와 사진은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고 있는, 마치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별빛과도 같습니다.

그것들은 한 줄기 선명한 빛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쏘아 보내고 있으면서 언제나 그 자리 그곳에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사진과 편지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 시점의 감정과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박제화시켜서 미래로 연결시키는 영험한 사물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은영 작가는 이토록 신비로운 의미를 가진 두 가지의 사물을 통해 소설을 이끌어나가고 있습니다.

분명하지 않은 기억, 어두컴컴한 기억을 사진과 편지의 도움을 받아 생생한 기록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비록 드라마적인 요소로 이끌어간 소설이기 때문에 문장력이라든가 문체가 그저 그런 소설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최은영의 밝은 밤은 독자들의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 사연은 모두 개별적입니다. 그런데 작품성을 평가할 때 이러한 개별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소설이라는 문학작품에 있어서 줄거리가 갖는 중요성은 퇴색되고 맙니다.

소설의 작품성을 논할 때 줄거리나 사연의 진실성이라든가 핍진성 등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모든 소설이라는 사건은 개별적이기 때문에 무차별하며, 무차별하기 때문에 가치적 판단에 있어서 차지하는 의미가 최소화되기 마련입니다.

대신에 작가의 문체가 중요해질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최은영 작가의 문체는 특색 없이 그저 그렇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을 뿐이지, 예술적 재능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문체만 놓고 보면, 오히려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보다 나을 게 전혀 없을 정도입니다.

그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진폭이 더 크다고 느껴질 뿐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문체란 것은 그저 문장력이라든가 필력 따위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을 반영한 것으로 기술이나 기교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교나 기술에 관해서 살펴본다고 해도 밝은 밤에 나온 문장들은 장면을 묘사하는 기교도 사실 그다지 특출 난 표현은 없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보여준 카잔차스키의 지중해 해변에 쏟아지는 햇살에 대한 묘사라든가, 나쓰메 소세키가 글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시적인 표현을 최은영 작가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마음의 보호대가 사라졌다는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최은영 작가가 지닌 문체의 특징은 마음과 관계에 대해 밀접한 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한국문학 특유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감성적 자극이 지닌 특유의 에너지 덕분에 많은 독자들이 최은영 작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봉착한 한계를 주목함으로써 자아도취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경험이 있거나 그러한 경험이 습관으로 굳어진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타인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처럼, 비록 지금 제가 최은영 작가 가진 작가로서의 한계를 논하고 있지만 이토록 그를 이해하고자 특별히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 그는 이러한 글을 반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놓치지 않고 가슴속에 부둥켜안고 있는 그러한 회한에 저는 제 자신을 던지면서 기꺼이 나서서 그 고민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순간 그는 삶을 관조적으로만 살아가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하고 분명한 목적의식과 함께 나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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