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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pr 09. 2023

홀로 길을 나서는 사람을 위한 변명




기지개를 켜고 체력을 끌어올리는 노력의 일환 중 하나로 3월 한 달 동안 관악산에 오르기로 했다. 어제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관악산은 그만큼 내게 하나의 지침이기도 했다.


그러나 계획은 사실 이렇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 약속이 과음이라는 결과를 낳을 거라는 예상 때문에 토요일은 작은 거인인 관악산에, 일요일에는 본격적인 체력 검증을 위한 중간급 거인인 14성문을 달리기로 했었다. 하지만 토요일 저녁 후배와의 약속은 어제의 체력소모를 위한 회복 시간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렇게 아침 늦게 눈을 뜬 나는 두 다리의 상태를 침대 위에서 확인했다. 무릎을 침대에서 떨어뜨리지 않은 채 양쪽 발목을 돌려보았다. 어제 무리한 산행 후 남은 경직된 근육이 여전하다는 걸 확인하는 것 말고는 특별할 건 없었다.


이런 조건으로는 관악산의 두 배에 이르는 북한산을 뛰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오늘도 어제와 같은 길을 걷기로 했다. 서울대 관악캠퍼스로 향하는 길에서 불현듯 나는 왜 매일 이렇게 혼자 산행에 나서는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변명거리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는 바로 "혼자 산에 가면 심심해서 재미없지 않아요?"라는 질문을 듣고 나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는 뒤늦은 자책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알지 못했던 나의 애매한 답변은 볼멘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견 이런 일은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경험을 만들어내는 어리석은 작자들이 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걸 정리하는 게 산행의 목적이 되어준 것만으로도 내게는 오늘 산행에 나서기로 한 나의 결정이 하나의 기쁨이자 희열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희열이 온몸으로 퍼져나간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고 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수가 없다.


어제는 시끄러운 속을 달래기 위해 거침없이 산을 올라갔었다. 내 앞을 막아서는 거북이 같은 등산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시끄러운 속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을 밀치거나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좁은 길을 비집고 다닌 것은 아니었으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는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저 나를 소진하기 위한 산행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느린 걸음은 소진하고자 하는 나의 목적에 필연적으로 방해가 되었다. 다만,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을 움직이는 데에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난 그 점을 활용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의 산행은 달랐다. 어제 산에서 두 다리에서 경련이 올라오는 특이점을 경험한 뒤로 양쪽 정강이의 감각이 상당히 둔했다. 이렇게 둔탁한 느낌이 강해지면, 다시 말해 그런 식으로 오랜 시간 동안 두 다리를 혹사시킨다면 모르긴 몰라도 피로골절에 가까운 부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오늘은 묵상의 길을 산을 따라갈 뿐이었다.


혼자선 심심할 텐데 왜 산에 가냐고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산행은 고집불통의 억지까지는 아니었다. 정확한 기억이 없어 누구의 생각인지를 말할 수 없지만, 글을 쓰기 위해 거짓 경험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진정한 글이 되기 위해서 그런 식의 거짓경험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경고를 아끼지 않았었다.


비록 오늘의 산행이 글을 쓰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기는 했지만, 내게는 오히려 자신을 증명하는 일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평소와 똑같이 거닐며 사색하는 시간에 나 자신을 던졌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묵묵히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걸어가는 나는 시끄러운 내면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스티븐 호킹 박사도 그런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내성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내면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치병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천재인 스티븐 호킹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내면을 가지고 있던 거인이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걷기를 한다고 말한다. 복잡한 내면을 끌어안고 산을 오르는 나의 산행을 이런 식의 간결한 말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거닐며 사색한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사색은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연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한다는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보여주는 모습에서도 그들은 그저 복잡한 생각을 잊게 되었다는 정도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나는 잊기 위해서 아니라 더욱 또렷하게 생경하게 바라보기를 원한다.


나는 산행을 하는 동안 사유에 질서를 부여한다. 가방에 생수 한 병과 커피를 들고 오르는 것처럼 하나의 질문을 마음에 품고 길을 나서는 순간이야말로 삶이라는 실재를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할 수 있다.


물론 사유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하나의 개념을 이끌어 내고 그것을 전문적인 철학 용어로 서술할 정도의 교육이라든가 훈련을 받진 못했다. 고작 하는 것이라는 건 이 정도의 글을 뽑아내는 것에 불과하니 용두사미급 사유의 효율성에 가깝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식의 관념론이 가진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유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실재가 없는지를 찾아야 했다. 물론, 사유는 우주 내 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실재일지도 모른다. 사유는 그저 스스로 사유하고 있다는 것을 사유함으로써 사유가 근원적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발견은 근대성을 열어젖히는 마법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저 사유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가 찾는 것이 우주 내에서 가장 확실한 존재를 찾는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가장 확실한 존재가 사유라는 사실이 갖는 중요성보다는 나는 삶이라는 근원적 실재가 갖는 명증성이 훨씬 더 필요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기억이야말로 자아의 가장 현실적인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필요에 의해 기억을 한다. 기억력이 좋은 것은 고대 그리스의 기억술을 일부 체득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나는 자아를 위한 필요에 의해 기억했던 것이었다.


삶이라는 근원적 실재의 내용이자 항목인 등산에서 사유와 함께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는 순간 삶에 대한 인식, 삶이라는 실재에서 나에 대한 인식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이 순간 오로지 나는 내 삶을 주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때 찾아오는 희열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다.


글의 집합인 책이라는 사물은 작가의 손 끝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서 완성된다고 했다. 오늘의 이야기가 완성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순전히 나의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작문실력의 결여, 그러한 결여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은 언제나 계속될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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