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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pr 09. 2023

바람을 위한 변명


복잡하다는 형용사보다는 번잡하다가 더 잘 어울렸던 지난 한 주를 무사히 마쳤다. 이런 한 주의 마무리는 역시나 특별할 게 없었다.


아니, 내게는 오히려 특별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금요일 밤은 될 수 있는 대로 Pilates의 도움을 받아 충전을 하는 시간이었으니깐.


지치고 쓰러질 것만 같아도 그 한 시간이면 선두를 먹은 것처럼 다시 원기를 회복할 수 있다. 단순한 에너지의 소비가 아니라 오히려 근골격계를 움직임으로써 에너지를 축적시킨다는 일은 다소 모순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현대인들은 쉽게 이해되는 일에만 의식을 내어줄 정도로 지쳐 있음이 분명하다. 세간의 오해를 말로써 해소시킬 수 있었다면 아마도 간접경험의 세계는 지금처럼 큰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직접경험을 이끌어내는 간접경험, 이러한 틈새 사이에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펼쳐진 잠재력은 발견한 자만의 특권이다. 인간은 살고자 하는 의지만큼 살아가게 되어 있는 법이다.


금요일의 휴식이자 회복은 토요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잠에 든 줄도 모르게 빠져들 때처럼 깊게 빠져든 무의식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훌륭한 친구이다.


토요일 아침도 평소와 같이 눈을 떴다. 깊은 숙면은 활발한 의식세계의 출발을 위한 연료였다. 몸을 침대에 의탁한 채 하루의 일과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의식의 흐름이 시간의 흐름과 맞닿았을 때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잠에 대한 욕구를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은 사유의 몫이었다. 다만 사유가 본능과 직접적으로 대면해서는 승산이 없다. 그래서 사유는 본능이 정점에 달할 때까지 조용히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준비를 마치고 급하게 차를 몰아 산 입구에 이르렀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인파들의 행진은 보고 있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예상 낮 기온이 23도를 육박했으니 울긋불긋한 복장의 등산객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 탓을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올라가는 내내 발에 차이는 것이 돌이 아니라 앞서 가던 사람의 등산화였다. 그만큼 나는 의지가 충만했고 의지를 불태워 올릴 활력도 충분했다.


그때였다. 사람들을 제치고 홀로 앞서가는 나를 두고 마음속 누군가가 소리쳤다.


한 무리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조금이라도 앞서가려는 젊은 친구는 과연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걸음을 서두르는 것인가?


'나는 그저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고 싶은 마음뿐이었소. 느릿느릿 걸어가는 사람들을 제친다고 해서 얻는 희열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던가'


볼멘소리로 나는 마음속 그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시 또 마음이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렇게 등산객이 많은 시간을 피하지 못하고 느지막이 출발한 것인가? 한계를 시험하려는 자네의 호기심이자 욕심이 우리를 불편하게 할 권리는 있는가?'


'그러한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호기심을 추구할 자유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난 그들을 앞서가려고 하는 동안에도 그저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내면에서 자기합리화를 펼쳐나가는 동안 어느새 정상에 이르렀다. 자기합리화의 근거를 빠른 걸음에 대한 병리학적 연구결과에서도 가져올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걸음을 빠르게 걷는 사람이 더 오래 살고 그 더 오랜 기간을 더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연구결과를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간은 살고자 하는 의지만큼 살아가게 된다. 나의 최종 목적이 비록 장수와 번영이 아니었지만, 단지 한계에 부딪히길 원하는 목적의 추구를 통해 곁가지로 얻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를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다.


산 정상에서 의자처럼 홈이 파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할 찰나에 뒤에서 갑자기 미끄러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가파른 경사에도 불구하고 등산화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온 사람이 가파른 비탈길을 가로지르다가 순간 미끄러지면서 주변 사람들이 "오우~"하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미끄러져 내 등허리 쪽을 타격할 것만 같아 자리를 옮겼다.


올라오면서 등산화보다는 사실 운동화를 더 많이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관악산이 629미터밖에 되지 않은 낮은 산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돌산이어서 릿지기능을 겸비해 접지력이 좋은 등산화를 신는 것이 안전에 훨씬 유리한데도 불구하고 밋밋한 운동화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느긋한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햇살이 눈부셔 가방에서 썬스틱을 꺼내 얼굴에 펴 발랐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썬스틱을 챙겨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계절의 변화를 몸소 체감하게 만들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소보루 빵 하나와 커피를 함께 즐겼다. 목이 막힐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러운 감촉에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오랜만에 20도에 육박하는 훈훈한 기온과 쨍쨍한 햇살 그리고 땀방울을 훔쳐가는 산바람 덕분에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신바람이 든 사람처럼 앞으로의 산행에 대한 기대감이 절로 가슴속에서 솟아올랐다.


에너지를 채웠으니 다시 움직여야 할 때였다. 가파른 경사로를 두 발로 선 채로 후다닥 내려왔다. 새로 산 캠프라인의 등산화가 보여준 접지력은 마음을 절로 편하게 만들어줬다.


굳이 비싼 등산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굳이 예쁘고 화려한 스타일의 등산화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적당히 가볍고 접지력이 훌륭한 등산화만이 필요할 뿐이다.


쇼트트랙 선수가 코너를 돌 때 손으로 짚은 채 마찰력을 접지력처럼 이용하듯이 캠프라인의 접지력과 나의 균형감각을 활용해 하산을 거침없이 진행했다. 사람들 사이에 난 틈을 놓치지 않고 앞서가기를 이십여 분 동안 했을까?


갑자기 자연 속에서 나와 바람만이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바람과 나, 그 두 사람만이.


두 눈을 들어 마주불던 바람을 마주보고 있었고 바람은 그런 나에게로 불어왔다.


두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 바람과의 대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순간이자 모든 것이 들려오는 찰나의 순간.


그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래, 내가 만나려고 했던, 내가 그동안 산에서 만나려고 했던 게 바로 너였어.


아무도 없는 한적한 산속에서 홀로 너와 마주보길 원했던 거였어!


그동안 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산에 다니는 이유가 한계에 부딪히고 싶다는 해괴망측한 소리나 떠벌렸던 자신에게 부끄러워졌다.


바람의 소리, 바람과의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오고 싶어 했던 산. 휴가를 내고 평일에 산속에서 앉아 귓가의 바람과 나누던 대화에 빠져들었던 그날들이 한꺼번에 바람을 타고 공중에 떠오르며 가슴속에 사무쳤다.


그 산을 나는 다시 만났다. 그토록 사무쳤던 산을.


어느 봄날, 그땐 내가 따스한 햇살 아래에 가만히 서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조용히 불어와 모든 것을 들려주렴.


어제처럼 그렇게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기만 하면 돼.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게.


어제처럼 다시 너에게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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