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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pr 14. 2023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의 사랑이라는 관념에 관하여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 따르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이원론적인 또는 이분법적인 관점만 있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오해를 방지하고자 다음의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이는 단지 예술을 보는 시선이자 관점에 관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예술을 해석하는 방법이 두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르테가가 "예술의 비인간화"라는 미학 에세이에서 설명한 방법은 시각이라는 감각이 기능하는 방법으로 비유한 것으로 그것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창문 밖의 정원을 바라본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실내에서 창문을 통해 정원을 보기 위해서 시선의 초점을 창문 너머의 정원에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해 초점을 창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창문 바깥의 정원에 있는 특정 사물에 두는 것이다. 창문이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우리는 보다 쉽게 시선을 멀리 던져 정원의 갖가지 사물에 닿게 함으로써 우리는 꽃이며 화단이며 분수대를 명확히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의 초점을 잡아당겨 창문에 맞춰 놓으면 창문 밖의 정원은 형태가 무너진 채 그저 형형색색의 불분명한 덩어리들로만 보인다. 이때의 우리 시선은 아무리 시선을 분산하려고 해도 양쪽의 사물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다. 환언하면 창문 그 자체와 창문 밖의 사물을 동시에 하나의 초점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런 시각적 현상은 사팔뜨기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시선을 정원의 사물에 두는 시선은 예술을 바라보는 인간적 관점, 창문에 두는 것은 비인간적 방법이다.


인간적이라는 뜻은 우리가 "살아 본"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적 시선은 예술작품을 바라볼 때 우리가 살아 본 경험을 동원해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비인간적인 관점은, 창문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은 관념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의 시선에 우리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예술가가 그의 작품에 반영해 놓은 그의 관념을, 그가 가지고 있는 줄도 미처 몰랐던 그가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그 관념을 우리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문학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것 같은 제목을 달고선 엉뚱한 이야기를 끌어낸 데에는 내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었다. 사강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오르테가의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다가 오르테가의 관점을 차용한 뒤에서야 사강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이런 관점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감상해 보자.


대신에 아직 사강의 작품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자세한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고 필요한 이야기만 나누면서 작품을 이해해 보자.


이 작품은 18장으로 구성된 중편소설이다. 단편이라고 하기엔 길고, 장편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다. 다만 그 여운은 상당히 오래간다.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여주인공 폴, 그의 연인인 로제 그리고 폴을 사랑하는 14살 연하의 남자 시몽.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이 소설은 낭만주의 특유의 연애소설과 그 결을 같이 이루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갑자기 폴은 과거로 회귀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책을 덮고 꽤 오랜 시간을 흘려보냈는데도 아무리 그녀를 이해해보려고 해 봤자 헛수고였다.


감정이입을 못하는 건가? 아니면 열애에 대한 감성만 발달된 채 이별에 대한 감수성이 턱없이 부족해서였을까? 두 가지 모두 나로선 납득할 수 없었다.

 

마치 직진하던 햇빛이 물을 만나 수면에서 굴절되는 것처럼 후반부에 이르러 소설의 전개가 갑작스럽게 굴절된다. 인간적으로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두 손으로 박수를 쳤다. 이해의 실마리는 바로 인간적, 이 세 글자에 있었다.


오르테가가 밝혔듯이 예술작품을 이해할 때 비인간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비인간적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적이란, 결국 우리가 살아 본 현실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비인간적이란 살아 보지 않은 현실에 불과한 것일까?


비인간적 관점을 이런 식으로 대립적인 의미로 국한해서 접근하면 예술에 대한 예술가의 관점을 애써 무시하는 셈이 된다. 미리 밝혔듯이 비인간적 관점은 바로 관념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사랑의 유효기간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떤 인터뷰에서는 "사랑은 기껏해야 2년, 아 길게는 3년 정도..."라고 밝혔을 정도였다.


사랑의 무상함을 알고 있던 그녀로서는 환희에 차오르던 연애가 갑작스럽게 과거로 회귀하는 식의 결론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애초에 그녀는 이 작품을 그저 낭만주의적 관점으로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 작품을 쓰고자 했던 의도는 바로 사랑의 영원함이 아니라 덧없음이었던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독자들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어놓고선 갑작스러운 상황의 급반전이 어찌 보면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이 작품을 "사랑의 무상함"을 노래하기 위해 쓴 것이었다는 애초의 의도, 그녀가 사랑을 바라보는 관념의 망루를 통해 결말을 본다면 이처럼 자연스러운 것도 없다.


오르테가의 말대로 관념은 세상을 바라보는 망루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관념이라는 망루에 서서 세계를 바라본다. 다만 사물을 보는 시각인 눈이 스스로를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관념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이 작품에 대한 단서를 얻었을 당시에 아마도 사랑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어렴풋하게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자신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지면 위에 수놓은 수재임에 분명하다.


예술가는 철학자가 아니다. 환언하자면, 예술가가 반드시 철학자일 필요는 없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철학, 다시 말해 시대적인 철학사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술가는 자신이 발견하고 해석한 세계를 그림과 이야기로 그려내는, 세계의 해석자를 자처한 사람이다. 과학이 설명하는 데에 실패하고, 논리조차 설명하는 데 실패한 세상에 대한 설명을 예술가 자신이 떠맡은 것이다.


두 남녀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반전에 이른 결말이 내포한 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사강의 관념이었다. 사강의 사랑에 대한 관념을 사유함으로써 나는 이 문학작품을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녀를 향해 찬사의 박수를 보내며 이 책을 내 안에서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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