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랬었다. 말의 힘을 한사코 부정해 왔었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을 때마다 내용의 유불리를 떠나 그 말들을 모두 부정했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그들은 나를 나만큼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나를 반사시키는 거울은 고작 공리주의 도덕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나를 두고 죄목을 일일이 읊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과 하나님뿐이라고 믿어왔다. 이 믿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효했다.
다시 말해 말에 관한 나의 신념은 말의 위세를 애써 부정하는 방향으로 고착되었다. 외부에서 전해져 오는 말이 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밀치는 힘에 맞서 싸우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대응방식이었다.
이는 비단 나만의 방식은 아니었다. 철학서를 탐독한 끝에 지적인 스승인 오르테가의 도덕론에 부합한다는 점을 운 좋게 발견했던 것이다.
도덕의 적은 부도덕함이 아니라 사악한 도덕이라고 했다. 도덕의 근간을 흔드는 사악한 도덕은 모든 공리주의에 편승한 도덕인 것이다.
비록 철학사에서 오르테가가 차지한 비중이 극히 미약하지만 20세기 유럽에서 니체 이후 최고의 지성으로 사상계를 이끌었던 사람과 동일한 도덕관념을 공통분모로 가졌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나의 신념은 그보다 더 큰 세계, 아니 우주의 주관자 앞에서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렸다. 그토록 한사코 부정했던 말의 권세에 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첫 번째 파도는 유발 하라리가 소개해준 것이었다. 클래식 음악이 동물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려는 연구자에 관한 것이었다.
연구자금이 부족한 그녀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논문 주제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답은 굉장히 단순했다.
바로 작금의 사회에 얼개를 구성하는 구조를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논문 주제는 이것이었다.
"클래식 음악이 젖소의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다시 말해서 원하는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살짝 표현을 바꾸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사회적 갈등은 무엇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어떻게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불량한 소수였다. 따라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합리를 활용하는 의도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도 나는 언어의 힘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더 가볍게로는 긍정적 언어와 고전음악이 식물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그랬더니 긍정적 언어와 고전음악은 식물의 성장에 아주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를 실험적으로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언어가 내게 미치는 영향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래서 외부에서 내게 전해지는 언어의 영향력을 강력히 차단하고자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이는 순전히 나의 착오였다. 시행착오였던 것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계신다. 그는 인격으로 존재하는 존재로서 존재의 근거를 말씀으로 세우셨다.
다시 말해 세상이 존립할 수 있었던 건 절대자의 언어로 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언어는 물질적 세계를 구성하는 비물질적 근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언어의 영향력을 배척하고자 했던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타인의 무참한 언행에 상처받지 않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했다. 그만큼 나는 절박했지만 핵심을 꿰뚫지 못한 채 너저분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은 나는 또다시 실패했지만 언어의 힘을, 세 치 혀의 권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처럼 나는 순진한 바보였다.
물질적 세계를 구성하는 비물질적 세계가 바로 언어였던 만큼 언어의 힘은 강력했다. 나만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