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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조고각하(照顧脚下)

by 이각형

주말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답답한 나머지 탈출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등산은 추워서 가기 싫었다. 그러나 뭔가 숨통이 막힐 정도로 몸을 한계치로 몰아세우고 싶었다.



목표를 달성한 뒤 숨통이 트이고 약간의 성취감을 느낄 만한 고된 일이었으면 했다. 그렇다면 딱 좋은 것이 실내 달리기였다.



지난번에 운동을 하고 나서 다시 주말을 맞아 트레드밀 위로 올라섰다. 삼일 만에 달리기를 하러 온 것이었다.



1분 정도 걷고 나서 속도를 고속으로 올렸다.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가뿐했다. 그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언제나 출발은 가뿐했다.



삼일 만에 뛰어서 숨이 턱턱 막힐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나의 착각이었다.



보통 5분을 넘기면 힘들어졌다. 뛰기 전엔 항상 오늘은 30분 이상은 뛰자, 30분을 뛰고도 힘이 남는 느낌이 들면 10km가 될 때까지 뛰자라는 목표를 세우곤 했다.



하지만 그 목표들은 언제나 5분을 버티지 못한 채 허물어지고 말았다. 5분만 지나도 숨통이 막혀 시작할 때의 의지는 어느샌가 사라져 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5km는 달리곤 했다.



역시 계획과 실행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달리기를 하면서 매번 목표달성 실패의 고배를 마신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는 너무 가뿐했다. 숨통이 트였는지 한참을 달리고 계기판을 보니 어느새 20분 가까이 달리고 있었다.



헬스장에 오기 전에는 5km만 뛰려고 했었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것처럼 사뿐사뿐 뛸 수 있게 되니 10km가 욕심이 났다.



지금까지 살면서 10km를 뛰어본 건 두 번밖에 없었다. 2019년과 2024년 2월에 각각 한 번씩.



산에서는 몇 시간이 걸리든 간에 15km나 25km 등 실컷 뛰어다녔었다. 그렇지만 평지에서 10km를 단시간 안에 달리는 일은 이제 고작 두 번밖에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10km도 내 딴에는 장거리 달리기에 속했다. 지난 두 번의 경험에 의하면 10km를 달리는 건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는 웬일인지 모르게 힘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숨통이 트였기 때문에 뛰는 내내 가벼웠다.



비록 마음은 무거웠을지 몰라도 한결 가벼운 몸놀림에 사뿐사뿐 경쾌한 발걸음은 쉽게 내 몸을 이끌었다. 생각보다 편안했다.



힘들지 않게 단숨에 10km를 내달린 것만 같았다. 50여분 만에 밖으로 빠져나오자 상쾌한 공기가 성취감과 함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었다. 그런데 오래가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는 동안 별안간 이상한 생각이 뇌릿속을 파고들었다. 너무 좋은 컨디션이 너무도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머릿속을 굴려보아도 좋았던 컨디션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운동하러 가기 전에 난 그저 두유와 은행잎 추출물을 먹고 나선 게 전부였고, 그건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병을 앓던 사람이 죽기 직전엔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혹시 10km 뛰는 동안 평소와 같지 않았던 좋은 컨디션이 곧바로 들이닥칠 죽음에 대한 징조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두려웠다. 세속에 정을 둔 지 50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가족이 있는 마당에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불안감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예정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소중해졌다.



별안간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돈이라든가 재산 같은 물질적인 그 무엇보다도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한없이 소중해졌다.



인연의 소중함은 망각이라는 안갯속에서 자취를 감추곤 한다. 반대로 모든 걸 잃어버릴 것 같은 순간에는 그 가치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다.



가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부동산, 주식 등 물질적인 것들에 붙여 쓰는 것이 아니다.



인연의 소중함은 소중함을 넘어서 숭고해지기까지 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사랑하는 아이,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여동생에 대한 기억이 불현듯 상실이라는 중력을 받아 급격히 무거워졌다.



그래, 맞다. 인간은 무지하다. 무지한 만큼 죄를 만든다. 죄를 만든 만큼 고개가 무거워진다. 무거워진 만큼 자기모순은 거대해진다.



존칭 하나로 우롱하거나 풍자하기보다는 조고각하(照顧脚下)의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며 신중하게 야유하는 것이 더 뜻깊다는 소세키의 고백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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