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과생이라는 말이 더 이상 중요하지않다.

문과생, 우주산업에서 역할로 일하게 되다

by 우주문과

처음에는 항상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문과생인데, 우주산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면,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다.

“문과인데요?”

“그럼 무슨 일을 하세요?”

“기술은 많이 아셔야 하지 않나요?”


그 질문들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도 문과생이라는 말로 내 위치를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사 초반에는 더 그랬다. 회의에 들어가면 기술 이야기가 쏟아졌고, 이해하지 못하는 말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문과니까, 이 정도만 알아도 되는 거겠지.’


문과생이라는 말은 그때의 나에게는 일종의 방패였다. 모르는 걸 숨길 수 있었고, 질문을 해도 이해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되어줬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니, 한 가지 분명해진 게 있었다.

엔지니어들 중에도 문과적인 감각이 뛰어난 분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이었다. 기술을 설명하는 방식이나, 전체 흐름을 잡는 시선을 보면 전공의 구분이 크게 의미 없어 보일 때도 많았다.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결국 중요한 건 문과냐 이과냐가 아니라,

각자가 맡은 역할과 그 역할을 대하는 태도라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내 역할도 조금씩 분명해졌다.

기술을 직접 만드는 일은 아니었지만, 사업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일정과 예산, 계약 조건, 그리고 규정을 함께 보게 됐다. 특히 법령이나 규정처럼 글로 이루어진 것들은 비교적 빠르게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과제 규정이나 협약서를 볼 때도, 조항 하나하나에 매달리기보다는

이 규정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지, 어디까지가 원칙이고 어디부터가 해석의 영역인지부터 정리하려고 했다.


지금 와서 보면, 이 부분이 문과로서의 강점이었던 것 같다.

법령과 규정은 결국 글이고 구조였고, 그걸 빠르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건 사업관리 업무에서 꽤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


그 덕분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겼다.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점점 늘어났고, 기술 회의뿐만 아니라 사업 관련 논의에도 자연스럽게 불려 다니게 됐다.

또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도, 규정 해석이나 전담기관 대응 방식과 관련해 도움을 요청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기술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은 아니었다.

대신 이런 질문들이었다.


“이건 규정상 문제없을까요?”

“전담기관에서는 이걸 어떻게 볼까요?”

“이 방향으로 가면 나중에 리스크는 없을까요?”


그때부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나는 문과생이었는데,

문과생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슨 전공인지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더 이상 “문과라서 잘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됐다.

그 대신 “이 선택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라는 말을 하게 됐다.


외부와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을 얼마나 깊이 아느냐보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서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 역할을 맡게 되니, 전공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지금 와서 보면, 문과생이라는 정체성은 분명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할 기준은 아니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문과든 이과든 결국 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

기술과 사업 사이,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무언가를 판단해야 하는 자리다.


그 자리에 오래 서 있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이렇게 소개하게 됐다.


“사업관리 쪽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과제 기획이랑 운영을 맡고 있어요.”


문과생이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게 가장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과생으로 우주산업에 들어왔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문과생이어서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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