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생이라는 변명
사업관리이든, 기획이든 문과생이라는 우물에 갇혀있으면 안 된다.
'나는 문과생이니까 몰라도 돼', '내가 사업관리인데 왜 알아야 해.', '문과생이니까 기술 이해 못 해도 이해해 주겠지.' 이런 변명, 딱 학생 때까지, 좀 더 넓게 본다면 인턴까지만 할 수 있는 변명이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이라면, 내가 가치를 증명해야 하고, 나를 성장시켜야 한다. 물론 이건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사업관리로 6년 넘게 일하고, 사업기획으로 직무를 변경하였고, 팀장으로 이직했다. 우주산업 내에서 이동했기에 당연히 이점은 있었지만, 사업기획 직무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이직해서 정부과제와 용역사업을 기획하고, 제안서를 쓰고, 수주하면서 성과를 냈다.
내가 직무 변경을 하고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사업관리를 하면서 산업과 기술에 대해 폭넓게 보았던 점과, 여러 제안서를 계속 보면서 나름대로 분석해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술을 모르면 기획을 못 한다
사업기획으로 직무를 바꾸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이거였다. '기술을 모르면 기획 자체가 안 된다.'
제안서를 쓰려면 해당 사업의 기술적 배경을 이해해야 하고, 정부 공고문을 읽으려면 거기에 나오는 기술 용어들을 최소한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기획서를 쓰면, 내용이 겉돌 수밖에 없다. 심사위원들은 금방 안다. '이 사람, 실제로 이해하고 쓴 건지 아닌지.'
다행히 나는 사업관리를 하던 시절부터 기술 이해를 놓지 않으려 했다. 엔지니어들과의 회의에서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그냥 넘기지 않고, 회의 끝나고 따로 찾아봤다. 위성 궤도가 뭔지, SAR 위성이랑 광학 위성의 차이가 뭔지, 우주발사체 단 분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당장 내 업무에 직결되지 않더라도, 꾸준히 쌓아뒀다.
그게 나중에 기획 업무로 넘어왔을 때 진짜 힘이 됐다.
제안서는 그냥 문서가 아니다
사업관리를 하면서 수십 개의 제안서를 봤다. 수주에 성공한 것도 있고, 떨어진 것도 있었다. 처음엔 그냥 '아, 이런 형식이구나' 정도로만 봤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는 눈이 생겼다.
'왜 이 제안서는 됐고, 저 제안서는 떨어졌을까?' 수주된 제안서와 탈락한 제안서를 비교해 보니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안서의 요구도는 만족할만한 기술을 제시하였는가. 심사위원 입장에서 읽기 쉬운가. 사업 목표와 수행 방법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우리 팀이 이 사업을 왜 잘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쓰여 있는가.
이걸 반복적으로 분석하면서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직접 제안서를 쓸 때 그 기준이 고스란히 적용됐다.
직무를 바꾼다는 것
솔직히 말하면, 직무를 바꾸는 건 쉽지 않다. 사업기획으로 넘어오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선뜻 움직이기가 망설여졌다. '6년 동안 쌓아온 사업관리 경력을 버리는 건 아닐까?' '기획 경험이 없는데, 뽑아줄 곳이 있을까?'
그런 불안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사업관리 경력이 기획의 기반이 된다.' 사업관리를 하면서 쌓은 정부과제 이해, 산업 전반의 흐름, 예산 구조 파악 이런 것들이 기획을 할 때 오히려 강점이 됐다.
처음부터 기획만 해온 사람과는 다른 시각으로 사업을 볼 수 있었고, 그게 차별점이 됐다.
우물 밖으로 나와야 보인다
나는 우주산업이 뭔지도 모르고 이 바닥에 들어왔다. 코드가 뭔지도 몰랐고, 위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팀장으로서 사업을 기획하고, 제안서를 쓰고, 수주를 만들어냈다.
그게 가능했던 건 딱 하나다. '문과생이니까 몰라도 돼'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았던 것.
우물 안에 있으면 편하다. 내가 아는 것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우물 밖으로 나와야 내가 얼마나 좁은 곳에 있었는지 보인다.
문과생이라는 건 한계가 아니다. 그걸 핑계로 삼느냐, 아니면 그 위에 더 쌓아가느냐의 차이일 뿐이다.